㉑ 시간의 원천 ― 엔트로피, 관점, 그리고 기억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바탕으로, 시간의 본질을 열적 시간·엔트로피·관점·기억의 관계로 해석합니다. 시간은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상호작용에서 창발한 다층적 구조임을 설명합니다.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열(Quantity of heat,$Q$)이 일(work, $W$)로 변환될 때의 손실을 설명하기 위해 엔트로피 개념을 도입했다. 엔트로피는 시스템의 무질서도(Disorder)를 정량화하며, 자연계의 변화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나침반이다. 자연은 결코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우주는 시스템과 환경을 합친 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Delta S \geq 0$)으로만 사건을 진행시킨다. 엎질러진 물이 다시 컵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실제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은 비가역적이다. 루트비히 볼츠만은 이를 확률로 설명했다. 질서 정연한 상태보다 무질서한 상태의 경우의 수(미시 상태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자연은 확률적으로 더 높은 엔트로피 상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곧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이유이다. 고립계의 엔트로피 증가는 곧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화살' 그 자체이다. (이미지: pages 제작)

현대 물리학은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무대를 해체했다. 우주의 기본 방정식에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변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전 우주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현재' 또한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근본적인 실체가 아니라, 복잡한 실재(Reality)의 근사치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다층적인 구조물이다. 시간은 독립적으로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 속에서 창발하는 현상이다. 시간은 사건의 네트워크이다.

앞선 장( ⑳ 시간 파헤치기―로벨리가 해체한 시간의 층위)에서 로벨리는 시간을 해체했다. 그렇다면 그 해체한 시간은 어디서 온 것일까?

무지(無知)가 빚어낸 시간

열적 시간: 흐릿함이 빚어낸 시간의 얼굴1)

우리가 식탁 위에서 마주하는 '잔잔한 뜨거운 물 한 컵'은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이 거시적인 고요함의 이면에는 치열한 미시적 역동성이 숨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물리학은 시간의 기원을 제시한다.

두 세계의 괴리: 배열과 거시 상태

특정 순간, 컵 안의 모든 분자가 갖는 위치와 속도의 구체적인 조합을 '배열(Arrangement)'이라 한다. 거시적으로는 동일해 보이는 하나의 상태(예: 뜨거운 물 한 컵)를 구성하는 내부 입자(원자, 분자)들의 순간적인 위치와 속도, 에너지 상태 등의 구체적인 모습을 가리킨다. 특정 순간에 컵 안에 있는 모든 물 분자 각각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사진처럼 찍은 것은 하나의 배열이고, 바로 0.000000001초 뒤에 다시 사진을 찍으면, 분자들은 그 사이에 이미 다른 위치로 이동하고 다른 속도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또 다른 '배열'이다.

'뜨거운 물 한 컵'이라는 거시적 상태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평형 상태'의 잔잔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 내부를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수십억 개의 물 분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충돌하고, 진동하는 열적 교란 상태에 놓여 있다. 이 문장의 핵심은, 시스템이 단 하나의 '배열'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요동친다는 점이다. 뜨거운 물의 총에너지를 만족시키는 분자들의 위치와 속도 조합(배열)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미시적 세계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물리학의 핵심 개념인 해밀토니안켤레가 등장한다. 에너지와 시간은 위치와 운동량처럼 서로 뗄 수 없는 켤레 관계를 형성하며 독특한 이중주를 연주한다.

해밀토니안 (Hamiltonian) : 시간의 지휘자

'시간의 흐름이 해밀토니안에 의해 생성된다'는 말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들여다보면 명확해진다. 이 방정식은 미시 세계의 상태($\psi$)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기술한다.

$i\hbar \frac{\partial}{\partial t} |\psi\rangle = \hat{H} |\psi\rangle$

이 식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좌변($i\hbar \frac{\partial}{\partial t}$): 상태 $|\psi\rangle$가 시간($t$)에 따라 변화하는 비율을 나타낸다. 즉, '시간의 흐름'이다.
우변 ($\hat{H}$): 계의 총에너지를 나타내는 연산자, 즉 해밀토니안이다.

시간에 따른 변화율($\frac{\partial}{\partial t}$)은 곧 해밀토니안($\hat{H}$)이 상태에 작용하는 것과 같다. 즉, 물리학적 관점에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스템에 '해밀토니안(에너지) 연산자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과 동치이다. 에너지가 0인(변화할 잠재력이 없는) 상태, 즉 에너지 차이가 없거나, 모든 고유상태가 동일한 에너지를 가질 경우, 물리적으로 구별 가능한 시간 변화는 사라진다. 에너지가 존재하고 작용해야만 상태가 변하고, 우리는 그 변화를 '시간의 흐름'으로 인식한다.2)

물리학적으로 해밀토니안은 시간의 흐름을 생성하는 엔진이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기술하는 모든 방정식은 에너지의 형식으로부터 도출된다. 즉, 뜨거운 물 속 분자들을 끊임없이 밀어내어 다음 배열로 이동시키는 구동력은 바로 해밀토니안이다.

켤레(Conjugate) : 보존의 족쇄

물리학과 수학에서 두 변수가 '켤레(canonical conjugate)' 관계에 있다는 것은, 한 변수가 다른 변수의 변화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소리나 빛 같은 파동을 분석할 때, '시간($t$)' 영역의 신호를 '주파수($f$)' 영역으로 바꾸는 것을 푸리에 변환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의 기초식인 플랑크 관계식($E = hf$)에 따르면, 에너지($E$)는 곧 진동수($f$)이다.

시간과 진동수가 역수 관계이듯, 시간과 에너지는 수학적으로 서로를 정의하는 짝(켤레)이다. 위치와 운동량이 짝을 이루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치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Delta E \Delta t \ge \hbar/2$)가 성립하는 이유도 이 둘이 켤레 관계이기 때문이다.

에너지와 시간은 켤레 관계이기에 서로를 강력하게 구속한다. 해밀토니안이 시스템을 격렬하게 변화시킬지라도, 이 변화는 '총에너지 보존'이라는 절대적인 규칙 아래서만 허용된다. 시스템은 동일한 에너지를 갖는 무수한 배열들의 집합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할 뿐, 그 에너지 준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해밀토니안과 켤레의 역할

물리학에서 해밀토니안($H$)은 계의 '총에너지'를 나타내는 함수이자 연산자이다. 하지만 '뜨거운 물'의 맥락에서 해밀토니안은 단순한 에너지의 총량이 아니다. 그것은 미시적 배열을 변화시키는 지휘자이다. 해밀토니안이 물 분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다음 순간의 상태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는 정적인 물(거시 상태)은 가만히 있지만, 해밀토니안은 쉴 새 없이 작동하며 현재의 '배열 A'를 찰나의 순간 뒤에 '배열 B'로, 다시 '배열 C'로 미시 상태로 변화시킨다. 해밀토니안 역학의 운동 방정식은 에너지가 어떻게 시간 변화율을 결정하는지를 보여준다. 즉, 해밀토니안이 작용하기 때문에 분자들은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시간을 생성한다.

에너지와 시간이 '켤레' 관계라는 것은, 이 둘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를 구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에너지가 시간의 흐름 속에 보존된다"는 사실이 이 관계의 핵심이다.

해밀토니안은 물 분자들을 미친 듯이 휘저어 배열을 계속 바꾼다(시간의 흐름).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절대 건드리지 않는 단 하나가 있으니, 바로 '총에너지'이다. 변화(시간)와 보존(에너지)의 역설이다.

이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면, 뜨거운 물 분자들의 모든 가능한 배열은 '동일한 에너지'를 가진 거대한 다차원 표면(에너지 등고선) 위에 존재한다. 해밀토니안은 시스템이 표면을 벗어나지 못하게 붙잡아 둔 채(에너지 보존), 그 표면 위에서만 미끄러지듯 이동하게 만든다(시간 흐름).

따라서 에너지와 시간의 켤레 관계는 "에너지를 보존하라는 명령(불변)을 수행하기 위해, 시스템은 끊임없이 상태를 바꾸며 시간(변화)을 흘려보낸다"는 물리적 서사로 읽을 수 있다.

우리의 눈(거시적 시각)은 해밀토니안이 만들어내는 개별 분자들의 춤(미시적 배열의 변화)을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그 분자들이 휩쓸고 지나간 평균적인 자취만을 볼 뿐이다. 해밀토니안은 에너지를 보존한 채 무수한 미시적 배열들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우리에게 하나의 흐릿한 궤적으로만 드러난다. 우리는 이 흐릿한 궤적을 ‘뜨거운 물’이라는 거시적 상태로 인식하고, 그 변화가 통계적으로 누적된 결과를 ‘시간이 흐른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정의한다.

해밀토니안은 뜨거운 물 속 분자들을 끊임없이 다른 배열로 밀어내는 구동력이며, 켤레 관계는 그 변화가 무질서해 보일지라도 총에너지 보존이라는 엄격한 궤도 위에서만 일어나도록 강제하는 법칙이다. 이 법칙 아래서 피어난 무수한 배열들의 통계적 환영, 그것이 바로 열적 시간이다.

시간이 상태를 만드는가, 상태가 시간을 만드는가?

기존 물리학과 열적 시간의 가장 큰 차이는 설명의 순서에 있다. 기존 관점은 절대적인 시간이 전제한다. 그 시간 안에서 에너지가 정의되며 물체가 변화한다. 앞에서 말한 시간 → 에너지 → 거시적 상태이다.

그러나 열적 시간의 관점은 우리가 인지하는 거시적 상태(통계적 분포)가 있고 이 상태가 에너지를 정의하며 그 에너지와 짝을 이루는(켤레) 변수로서 '시간'이 도출된다. 거시적 상태 → 에너지/엔트로피 → 시간이다.

결론: 열적 시간의 탄생

우리의 눈과 감각은 개별 분자의 움직임을 모두 쫓을 수 없다. 우리는 그 복잡한 미시적 변화를 '흐릿하게' 평균 내어 인식할 뿐이다.

우리는 개별 분자의 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춤의 총체적 결과물인 '뜨거운 물'을 본다. 이때 해밀토니안이 에너지를 보존하며 만들어낸 무수한 배열들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을 우리가 통계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시간'이라는 개념이 창발한다. 따라서 열적 시간 가설에서 시간은 우주가 시작될 때부터 깔려 있는 무대(배경)가 아니라, 물질들의 열역학적 상호작용이 빚어낸 '창발적 현상'이다.

즉,시간의 흐름이 거시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흐릿한 거시적 인식이 시간을 결정한다. 이렇게 정의된 시간을 '열적 시간'이라 부른다.

요약하면 열적 시간은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이 만들어낸 통계적 결과물이다. 인간은 미시 세계의 무수한 입자 하나하나의 움직임(배열)을 모두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평균값'으로 뭉뚱그려 인식하는데, 이러한 거시적 관점(흐릿한 시각)이 역설적으로 시간이라는 변수를 탄생시킨다. 즉, 거시적 '흐릿함'이 시간을 잉태한 것이다. 마치 우리가 낱개의 물 분자 움직임은 보지 못하고 '뜨거운 물'이라는 전체적인 상태만 볼 때 온도를 느끼는 것처럼, 미시적 변화의 디테일을 보지 못하고 전체적인 흐름만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시간은 우주의 차가운 배경이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가 얽혀 빚어낸 뜨거운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열적 시간의 의미와 특징

'열적 시간'은 19세기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어 로벨리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개념이다.

전통적인 시간(뉴턴의 시간)은 모든 변화의 원인이자 배경이었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세상이 변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적 시간'은 정반대이다.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특히 거시적 상태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변화의 순서를 기록하기 위한 변수로서 '열적 시간'을 정의한다. 즉, 시간은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일 뿐이다.

시계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계 내부의 태엽이 풀리거나(엔트로피 증가) 건전지가 닳는(엔트로피 증가) 것과 같은 물리적 '변화'가 일어날 뿐이다. 우리는 이 규칙적인 변화를 다른 변화들(지구의 자전, 우리의 노화 등)과 비교하며 '시간'이라는 척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열적 시간은 이 원리를 우주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열적 시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비대칭성, 즉 '시간의 화살'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근본적인 미시 세계의 물리 법칙들은 대부분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완벽하게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의 거시 세계에서는 컵이 깨지기만 할 뿐, 깨진 컵이 저절로 붙지 않는다.

열적 시간은 이 비대칭성을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직접 연결한다.

'시간의 흐름'이란, 다름 아닌 우리 우주가 통계적으로 압도적인 확률을 따라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서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나아가는 거대한 과정 그 자체이다.

"흐릿한 거시적 상태"가 핵심이다. 만약 우리가 신처럼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아는 '선명한' 미시적 시각을 가졌다면, 엔트로피라는 개념도, 열적 시간이라는 개념도 사라진다. 모든 것은 그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입자들의 춤일 뿐, '과거'와 '미래'라는 특별한 방향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수많은 입자들의 개별 정보를 무시하고 '온도', '압력'과 같은 평균적인 거시적 변수로 세상을 바라볼 때(즉, 세상을 흐릿하게 볼 때), 비로소 엔트로피가 정의되고, 엔트로피의 증가라는 비가역적 과정, 즉 '열적 시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무지 혹은 관점의 한계가 시간을 탄생시키는 셈이다.

열적 시간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강요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 방식과 깊이 얽혀 있는 시간이다.

기억은 우리의 뇌가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뇌 안에 비교적 질서 있는(낮은 엔트로피의) 흔적을 남기는 열역학적 과정이다. 우리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과정의 일부로서 과거의 흔적을 간직할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가 되고, 미지의 '미래'가 다가오는 듯한 감각은, 우리라는 거시적 존재가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라는 거대한 흐름에 동기화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인식이다.

결론적으로 '열적 시간'이란,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실체가 아니라 우주가 낮은 엔트로피라는 특별한 초기 상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과, 우리가 세상을 거시적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것은 세상의 변화 방향에 붙여진 이름이며,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우리의 기억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과정 그 자체이다. 결국 '열적 시간'의 관점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화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변화의 방향성에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적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시간성은 희미함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희미함은 우리가 세상의 미시적인 세부 사항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결국 물리학의 시간은 세상에 대한 우리 무지의 표현이다. 시간은 무지인 것이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희미하고 불확실한 이미지가 열적 시간이라는 변수를 결정한다. 그 변수는 분명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과 닮은 어떤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고, 평형 상태와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

열적 시간은 열역학, 그러니까 열과 관련이 있지만, 아직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는 유사하지 않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고 방향도 없으며 우리가 흐름이라 말할 때 부여하는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 그것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관점: 시간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의 엔트로피가 과거에 낮았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인할 수 있다. 그러면 엔트로피가 과거에는 왜 낮았을까?

엔트로피의 본질: 희미한 시각과 무지

나와 물 한 컵 사이의 물리적 상호 작용은 각 물 분자의 움직임과는 무관하다. 마찬가지로,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 사이의 물리적 상호 작용은 저 밖에서 벌어지는 자세한 일들을 무시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희미하다. 왜나하면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의 일부와 나머지 세상 사이의 물리적 상호 작용이 수많은 변수들에 대해 여전히 깜깜하기 때문이다.

이 희미함에서 열과 엔트로피의 개념들이 탄생하고, 이 개념들은 시간의 흐름을 규정하는 현상들과 연결돼 있다. 한 시스템의 엔트로피는 전적으로 우리의 '희미한 시각(무지)'에 달려 있다. 엔트로피가 나의 '무지(알아채지 못한 것)'에 의존하는 까닭은, 엔트로피의 정의 자체가 '구별할 수 없는' 무수한 배열들의 수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희미함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상호 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엔트로피는 임의의 주관적인 양이 아니다. 속도처럼 ‘상대적인’ 양이다.

여기서 ‘배열 수’란, 물리계 A가 가질 수 있는 미시적 상태의 수를 말한다. 예를 들어, A가 여러 입자로 이루어진 시스템이라면, 그 입자 각각이 가질 수 있는 위치, 속도, 에너지 상태의 가능한 조합을 모두 세는 것이다. 즉, 배열 수 = 가능한 미시 상태의 개수 = $\Omega$ 이다.

엔트로피는 이 미시상태의 수를 바탕으로 정의된다.
볼츠만의 유명한 식: $S = k \ln \Omega$
여기서 $S$: 엔트로피, $k$: 볼츠만 상수, $\Omega$: 미시상태의 총 수(배열 수)

이 식은 “어떤 거시적 상태가 얼마나 많은 미시적 배치를 가질 수 있는가”를 계산한다는 뜻이다. 즉, ‘A의 배열 수를 계산한다’는 것은 A가 외부(B)와의 상호작용을 고려했을 때, 구분되지 않는 미시 상태가 몇 가지나 가능한지를 세는 행위이다.

엔트로피는 관계적 물리량이다.

엔트로피는 고립된 계(전체 A+B)에서는 절대적인 값이 아니라, 관계적 양이다. 즉, A의 엔트로피는 B(환경 또는 관찰자)와의 물리적 상호작용에 따라 정의된다. 이때 “A와 B 사이의 물리적 상호작용들이 구분하지 않는 A의 배열 수”란, B가 관측할 수 없는 A의 내부 상태, 즉 B의 시점에서 서로 구분되지 않는 A의 미시상태의 수를 의미한다.

“A의 배열 수를 계산한다”는 말은 B가 구분하지 못하는, A 내부의 가능한 미시적 상태(배열)의 총 개수를 세어 그 로그값을 엔트로피로 환산한다는 뜻이다. 거시적 상태는 우리가 밖에서 관찰할 수 있는 시스템의 모습이다. (예: 상자 속 기체의 온도, 압력, 부피) 미시적 상태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개별 입자들의 구체적인 배열이다.

엔트로피는 '경우의 수'(배열 수, $\Omega$)가 많은 상태일수록 높다. "B와 관련 있는 A의 엔트로피"라는 관계적 측면에서 A는 우리가 관찰하려는 시스템(예: 컵 속의 커피), B는 관찰자 또는 A와 상호작용하는 다른 시스템(예: 사람, 온도계)이다.

B(관찰자)는 A(커피)의 모든 물 분자 하나하나의 위치와 속도(미시 상태)를 알 수 없다. B는 단지 A와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온도가 80도다'와 같은 거시적 정보만을 파악할 수 있다. B에게 '온도 80도'라는 거시 상태는 동일하게 보이지만, 그 80도를 만들어내는 A(커피) 내부 물 분자들의 미시적인 배열(경우의 수)은 사실상 무한히 많다.

”관찰자 B에게는 똑같은 거시 상태(예: '온도 80도')로 보이는, 시스템 A 내부의 모든 (서로 다른) 미시적 상태의 총 개수를 세는 것”, 이것이 바로 관찰자 B가 시스템 A에 대해 갖는 정보의 불확실성이며, 그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A의 엔트로피이다.

B가 A에 대해 더 세밀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즉, 더 많은 정보를 안다면), B에게 '같은 상태'로 보이는 배열의 수($\Omega$)는 줄어들고, 따라서 B가 측정한 A의 엔트로피는 낮아진다.

시간의 화살과 특별한 상호작용

따라서 세상의 엔트로피는 세상의 배열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하는 방법에 의해서도 달라지고, 우리와 상호 작용하는 세상의 변수들이 무엇인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즉, 세상의 엔트로피는 세상에서 우리가 속한 부분과 상호 작용하는 변수들의 영향을 받는다.

아주 먼 과거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에게 매우 낮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엔트로피는 세상의 상태를 빈틈없이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변수들 가운데 물리계로서 ‘우리’와 상호 작용해온 일부 변수들의 집합만을 고려한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세상과 상호 작용하면서 세상을 설명할 때 기술하는 거시적 변수들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극적인 희미함이 발생할 수 있고, 이와 관련하여 우주의 엔트로피가 낮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에 우주가 매우 독특한 배열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대신 우리와, 우주와 우리의 상호 작용이 아마도 특별한 것이다. 우주의 특별한 거시적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우리’다. 우주 초기의 엔트로피, 즉 시간의 화살은 우주보다는 ‘우리’로 인한 것일 수 있다.

우주 초기의 낮은 엔트로피는 우리가 우주와 상호 작용을 하는 특별한 방식, 즉 우리가 속한 물리 체계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우주의 양상들 가운데 일부의 특별한 집합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 집합’이 시간에 맞춰져 있다.

우리와 나머지 세상 사이의 특별한 상호 작용이 어떻게 낮은 초기 엔트로피를 결정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붉은색 카드 6장과 검은색 카드 6장, 총 12장의 카드를 준비해보자. 붉은색 카드 6장이 앞쪽에 오도록 정리한다. 카드를 섞은 뒤, 카드가 섞이면서 붉은색 카드 6장 사이에 끼어 들어간 검은색 카드들을 찾아보자. 카드를 섞기 전에는 처음 6장의 붉은색 카드 사이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던 검은색 카드가 많이 보이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를 보여주는 간단한 예다. 카드를 섞기 전에는 붉은색 카드 6장 사이에서 검은색 카드의 수가 0이다. 이 경우는 엔트로피가 낮다. 이때는 ‘특별한’ 배열 상태인 것이다.

이번에는 다르게 카드를 아무렇게나 섞은 후, 앞쪽에 있는 6장의 카드를 보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카드를 다시 조금 섞은 후 처음 6장의 카드 사이에 들어간 나머지 다른 카드들을 찾아보자. 먼저 했던 카드 섞기에서처럼, 처음엔 카드들 사이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던 다른 카드들이 점점 많이 나타나고 엔트로피도 증가한다. 하지만 지금의 카드 섞기 사례는 앞선 카드 섞기 사례와 중대한 차이가 있다. 카드 섞기를 시작할 당시 카드들이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처음에 ‘여러분’이 앞쪽 부분에 어떤 카드들이 있었는지를 기록해두었기 때문에, 이 카드의 배열은 매우 특별한 배열로 선언되었다. 엔트로피가 적은 상태인 것이다.

엔트로피는 “관측자가 무엇을 구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A 계의 엔트로피는 B가 구분하지 못하는 A의 미시상태 개수, 즉 어떤 변수를 관측하고 어떤 변수를 무시하는지에 따라 엔트로피 값이 달라진다. 카드에 비유하면, ‘앞의 6장만 관측’하는 규칙을 선택하면 특정 상태가 매우 특별(낮은 엔트로피)하고, 모든 12장을 다 보면 특별할 것 없는 평형상태(높은 엔트로피)이다. 이것은 동일한 상태도 관측 규칙에 따라 엔트로피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우주는 엄청난 수의 계들로 구성되어 상호작용하며 “특별한 관측 규칙을 가진 물리계”가 반드시 존재한다.

확률적으로 보면, 어떤 계는 다른 계의 아주 특정한 변수들과만 상호작용하도록 ‘우연히’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이 계 입장에서 보면, 우주의 한 특정 시점이 특별한 상태(낮은 엔트로피)로 보인다. 즉, 특별함은 우주 전체의 특성이 아니라 그 계가 택한 변수의 특성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특별한 변수 세트”를 가진 계이다. 우리의 물리적 상호작용 방식은 밀도 요동, 온도 차, 중력 퍼텐셜의 분포, 복사 흐름, 화학적 자유에너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 변수들은 초기 우주에서 매우 특이한 값을 가졌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는 극도로 “정돈된” 중력 분포로 낮은 엔트로피 상태였으며, 현재는 중력 붕괴, 별 형성, 질서 붕괴 등으로 엔트로피가 증가된 상태로 해석한다. 즉, 우리가 사용하고 구분하는 물리 변수들의 세계에서만 시간의 화살이 나타난다.

시간의 속성

시간의 흐름은 우주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의 특정한 관측 방식에서 기인한다. 우주 초기의 엔트로피, 즉 시간의 화살은 우주보다는 ‘우리’로 인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우주의 특정 변수를 구별하는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우주와 상호 작용하며, 그 관점에서 과거가 특별(낮은 엔트로피)해지는 것이다. 결국, 시간은 우리라는 존재가 우주에 새겨 넣은 관점의 흔적이다.


특별함에서 나오는 것

변화의 근원: 낮은 엔트로피

세상을 움직이게(변화하게) 만드는 동력은 에너지가 아니다. 바로 '낮은 엔트로피'다.

에너지(기계, 화학, 전기 혹은 잠재 에너지)는 열에너지로, 즉 열로 전환되어 차가운 사물로 이동하는데, 이 지점부터는 특별한 조치 없이 에너지를 이전 단계로 되돌릴 수 없다. 식물을 자라게 하거나 모터를 돌리기 위해 재사용할 수도 없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는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엔트로피는 상승하는데, ‘이것’ 역시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다.

낮은 엔트로피가 없으면 에너지는 균일한 열로 약해지고, 세상은 열평형 상태에서 잠들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도 사라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구는 가까이에 태양이 있어서 낮은 엔트로피의 원천이 풍부하다. 태양이 따뜻한 광자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구는 아주 차가운 광자들을 방출하면서, 어두운 하늘 쪽으로 열을 발산한다. 유입되는 에너지의 양은 방출되는 에너지 양과 거의 같아, 결과적으로 이 교환에서는 에너지를 얻지 못한다. 에너지가 남으면 기후 온난화가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재앙이다. 그런데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도착한 뜨거운 광자 하나당 차가운 광자 열 개를 방출한다. 뜨거운 광자 하나의 에너지가 지구에서 방출된 차가운 광자 열 개의 에너지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광자 하나는 차가운 광자 열 개보다 엔트로피가 적다. 뜨거운 광자 하나의 배열의 수가 차가운 광자 열 개의 배열의 수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다.

낮은 엔트로피가 풍부하고, 그 덕분에 식물과 동물이 성장하고, 우리가 모터와 도시를 만들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태양의 낮은 엔트로피는 태양 자체의 낮은 엔트로피 배열에서 탄생했다. 태양계가 형성된 원시 구름은 엔트로피가 더 낮았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주 초기의 극도로 낮은 엔트로피에 이르게 된다.

엔트로피를 여는 문: 별과 생명

엔트로피의 증가를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장애물은 우주 곳곳에 널려 있다. 과거에 우주는 기본적으로 수소가 방대하게 펼친 곳이었다. 수소는 헬륨으로 융합될 수 있는데, 헬륨이 수소보다 엔트로피가 높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길이 열려야 한다. 별이 점화돼야 수소가 헬륨으로 연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별에 불을 붙일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또 다른 과정이 있다. 은하를 떠돌아다니는 거대한 수소 구름이 중력으로 수축되는 과정이다. 수축된 수소 구름은 분산된 수소 구름보다 엔트로피가 훨씬 높다. 수소를 태워 헬륨으로 만드는 핵융합 과정의 점화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문이다.

생명체도 유사하게 상호 뒤얽힌 과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광합성은 태양으로부터 받은 낮은 엔트로피가 식물에 쌓이는 과정이다. 동물은 음식을 섭취하는 방식으로 낮은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음의 엔트로피(Negentropy)'3)를 섭취함으로써 자신의 열역학적 평형(죽음)을 지연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단순히 낮은 엔트로피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살아 있는 모든 세포의 내부는 복잡한 화학 공정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이는 마치 낮은 엔트로피가 높은 엔트로피로 흘러가도록 하는 '문'을 정교하게 여닫는 구조물과 같다. 이 과정에서 세포 내의 분자들은 촉매로서 기능하여, 서로 얽혀 있는 공정들이 원활히 일어나도록 촉진하거나 필요에 따라 억제하는 조절자 역할을 수행한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모든 공정에서 발생하는 '엔트로피의 증가'가 생명의 모든 역동적인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인 원동력이 된다는 점이다. 즉, 생명이란 질서를 무작정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촉매가 되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과정들이 촘촘히 엮인 '스스로 작동하는 네트워크'이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 낮은 엔트로피

우주의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무질서해지는 과정이다. 마치 처음에는 정리되어 있던 카드 묶음을 섞으면 섞을수록 무질서해지는 것과 같다. 우주를 섞는 거대한 손은 따로 없고,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우주의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 작용 속에서 스스로 조금씩 섞일 뿐이다.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통로들이 열려 이를 통해 무질서가 퍼져나갈 때까지, 광활한 영역들이 질서정연한 배열 속에 갇혀 있다.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는 이후 매우 중요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 결과는 언제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고, 또한 과거와 미래의 차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흔적만 있는 이유는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과거의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것뿐이다.

흔적이 남으려면 무엇인가 정지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을 통해서만, 즉 에너지를 열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열이 없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탄력적으로 튕기고 그 어떤 것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풍부한 옛 흔적의 존재는 과거가 결정되어 있다는 친숙한 느낌을 준다. 어떤 비슷한 미래의 흔적도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열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흔적의 존재는 우리의 뇌가 지나간 사건들의 지도를 광범위하게 펼쳐놓을 수 있게 해주지만, 미래의 사건에 대한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느낌의 바탕을 이룬다. 과거에 대해서는 뭔가를 할 수 없을지라도, 다양한 미래에 대해서는 선택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뇌의 방대한 메커니즘을 직접 인지하지 못한다. 이 메커니즘들은 발생 가능한 미래를 계산하기 위한 진화 과정에서 설계되었다. 이를 우리는 ‘결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세부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현재가 정확히 예외적인 상황이 되면, 뇌의 메커니즘이 대체 가능한 미래를 탐구하게 될 것이다. 이때 자연스럽게 ‘결과’에 선행되는 ‘원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미래 사건의 원인은 과거 사건이다. 그 원인이 된 사건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동일한 세상이라면 미래 사건이 더 이상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경험상, 원인이 결과에 선행한다는 개념은 시간과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두 가지 사건의 원인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가 있는데, 특히 이 공통적인 원인을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발견한다. 공통 원인이 과거에 존재한다는 것은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징후일 뿐이다. 열평형 상태나 순수한 기계 시스템에서는 인과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시간의 방향이란 없다.

특별함에서 나오는 것

기억, 원인, 결과, 흐름, 과거의 확정적 본성 그리고 미래의 비결정성은 우리가 통계적 사실의 결과에 이름을 부여한 것일 뿐, 우주의 과거 상태는 있음 직하지 않다. 원인과 기억, 흔적, 세상의 발생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수세기, 수천 년 동안의 인류 역사뿐 아니라 수십 억 년에 걸친 우주의 방대한 대하드라마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의 배열이 몇 십억 년 전에 ‘특별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특별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이다. 관점과 관련해서 특별하다는 것이다. 과거 사물의 배열에서 특별함이라 희미함이다. 사물의 배열은 하나의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상호 작용할 때, 그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인과, 기억, 흔적, 세상의 발생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관점의 효과일 수 있다.


관점의 효과

기초 물리학 법칙(중력, 전자기력, 양자역학 등)은 시간을 대칭적으로 다룬다. 입자 하나의 수준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규칙성'만 존재하며, 과거와 미래가 동등하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거시 세계)은 원인이 결과를 낳는 비대칭적인 시간 속에서 산다.

이 거대한 간극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통계와 관점이다.

관점: 희미한 거시상태와 특별함

우주의 미시상태에 있는 모든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는 '순수한 기계 시스템'의 완전한 정보이다. 근본 법칙은 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하지만 이는 거시상태에서 우리가 '관찰'하고 '상호작용'하는 뭉뚱그려진 정보이다. (예: 방 안의 '온도', '압력', '깨진 컵', ‘발자국') "희미함"이란, 우리가 미시상태 전부를 보지 못하고 거시상태로 세상을 "뭉뚱그려" 또는 "희미하게" 본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방 안의 공기를 볼 때, 미시상태에서는 $10^{26}$ 개가 넘는 공기 분자 각각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의 정보가 있다. 하지만 거시상태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온도, 1기압인 '방 안의 공기' 일 뿐이다. 우리는 절대로 개별 분자를 추적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점'은 거시적이다.

엔트로피란 우리가 정의한 하나의 거시상태에 해당하는 미시상태의 배열 수이다. 낮은 엔트로피(특별한 상태)는 공기 분자가 모두 방 한쪽 구석에 몰려있는 거시상태이다. 이 상태를 만들 수 있는 미시적 배열의 수는 극히 적다. (매우 "있음 직하지 않은", "특별한" 배열이다) 반면 높은 엔트로피(평형 상태)는 공기 분자가 방 전체에 고르게 퍼져있는 거시상태이다. 이 상태를 만들 수 있는 미시적 배열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많다.

바로 우리의 '관점'이 이 "희미함"(거시상태)을 만들어내고, 이 관점으로 과거를 보니 "특별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우주의 초기 상태(빅뱅)는 극도로 낮은 엔트로피 상태였다. 이는 우리의 거시적 관점으로 볼 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배열(극소수의 미시상태)이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특별한(낮은 엔트로피)' 과거를 전제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 원인(Cause)은 상대적으로 질서 잡힌(낮은 엔트로피) 상태이고 (예: 온전한 컵, 사람의 생각), 결과는 더 무질서해진(높은 엔트로피) 상태이다(예: 깨진 컵, 종이에 쓰인 글씨).

평형상태: 시간의 방향성

우리가 경험하는 '원인 -> 결과'의 흐름은, 단지 우리의 '희미한' 관점으로 볼 때, 통계적으로 '특별한' 상태에서 '평형 상태'로 이행하는 압도적인 경향성일 뿐이다. 근본 법칙(미시상태)에는 없는, 거시상태(관점)에서만 나타나는 통계적 사실이다.

"기억, 흔적" (예: 발자국, 화석, 뇌 속의 기억) 역시 "관점의 효과”이다. 이것들은 현재에 남아있는 '질서 잡힌(낮은 엔트로피)' 구조이다. 우리는 이 '현재의 질서'가 과거의 더 큰 질서(원인)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우주가 '특별한' 과거에서 '평형 상태'의 미래로 향하는(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성을 갖기 때문이다.

만약 우주가 열평형 상태라면(엔트로피가 최대라면), 무작위한 요동으로도 발자국 '처럼' 보이는 것이 생길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과거에 누군가 걸어갔다'는 원인과 연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 상관관계가 통계적으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점의 효과

138억 년 전, 우주는 (우리의 거시적 관점으로 볼 때) 극도로 "특별한"(낮은 엔트로피) 상태에서 시작했다. 우리의 관점은 세상을 개별 입자(미시상태)로 보지 않고, "희미하게" 뭉뚱그린 거시상태로 상호작용한다. 이 '관점'으로 '특별한' 과거를 가진 우주를 볼 때, 시스템은 압도적인 통계적 확률로 '특별한' 상태에서 '평형 상태'로만 진행한다.

우리는 이 통계적 경향성에 '시간의 흐름', '인과관계', '기억'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근본 법칙이 아니라, "단지 관점의 효과"일 수 있다. 우리가 과거를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과거가 질서정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미래가 무질서 속으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 시간의 흔적

세상은 관계와 사건들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차는 모든 바퀴와 자축, 멍에 등이 모여 함께 작동하고 우리와도 어떤 관계를 맺는 전체 관계망의 하나이다. 관계와 사건을 넘어서는 실체인 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정들이자 사건들이며, 구성물이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의 정체성과 유일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그중 근본적인 것이 기억이다.

우리의 뇌는 기억을 통해 사실을 기록하고, 감정을 각인시키며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다.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생존의 기회를 늘리는데, 진화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뇌 구조를 선택해왔다. 우리가 바로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선택이 우리 정신 구조의 핵심이다. 이 선택이 우리에게는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일은 내면의 일부이며, 뇌에 남은 과거의 흔적들이다. 시간은 엔트로피의 변화에서 만들어진 흔적들이다.

뇌는 결국 외부 세상과 우리 마음의 작동 구조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존하는 실재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정신이란 결국 뇌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뇌 전체가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들에 기초해서 작동하는 뜻이다. 시냅스는 수천 개씩 계속 만들어지지만, 특별히 잠자는 동안 과거 우리 신경계에 작용하던 흔적에 대한 희미한 생각만 남겨두고 사라진다.

우리의 눈은 매 순간 수백만 가지의 세부 사항을 보지만, 그 모든 것이 기억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뇌에 남은 그 '희미한 이미지'가 바로 세상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이 끝없는 세상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초반부에서, 어린 마르셀이 매일 아침 알 수 없는 심연에서 거품처럼 의식이 떠오르는 어지러운 순간에 당황하여 재발견하는 세상이다.

이 소설은 세상의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 속에만 있는 이야기다. 마르셀의 뇌 시냅스들에 들어 있는 무질서하고, 미세한 풍경들만 가득한 책이다. 그 속에서, 프루스트는 경계 없는 공간과 현실적이지 않은 미세한 것들의 무리, 향기, 생각, 감각, 성찰, 고민, 색상, 물체, 이름, 시선, 감정 등을 발견한다. 이 모든 것들이 마르셀의 뇌 주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저 안에, 우리 내면의 신경에 남아 있는 그토록 중요한 과거의 흔적들이 있는 곳에 시간의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프루스트는 “현실은 오직 기억 속에서 형성된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확고부동했다. 그리고 기억은 흔적들의 총체이자 세상의 무질서와 엔트로피 방정식의 간접적 산물이다. 이 방정식은 세상의 상태가 과거에는 ‘특별한’ 구성이었으며, 그 때문에 흔적도 남았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우리를 포함한 아마 아주 드문 부분 계와 관련돼 있기에 ‘특별한’ 것이다.

우리의 눈 뒤쪽에 있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20센티미터 크기의 회색질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즉 앞날을 예측하려는 우리의 연속적인 과정과 결합된 기억이 시간을 시간으로, 우리를 우리로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이것이 시간이다.


시간의 원천

온 우주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관찰자의 위치, 속도, 중력에 따라 각기 다른 리듬으로 흐르는 개별적 현상이다.

세상을 설명하는 근본적인 물리 방정식에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변수도, 특별한 '시간' 변수도 없다. 우주의 기본 문법은 사물(Things)이 아닌 사건(Events)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이 없는 우주에서 어떻게 우리가 느끼는 '흐르는 시간'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우리의 무지(Ignorance)''관점'에서 탄생했다.

희미함이 시간을 만들었다. 우리는 우주의 모든 미시적 상태를 알 수 없다. 이 '흐릿한 시각' 때문에 통계적인 평균값인 엔트로피가 등장한다. 우리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을 '시간의 흐름'으로 인식한다. 즉, 시간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맺는 불완전한 상호작용 속에서 피어난 현상이다.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단일하고 흐르는 시간은, 복잡한 우주의 실재를 인간의 생존에 맞게 단순화한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이라기보다 본질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시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수 세기 동안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수직 상승했고, 지금도 계속 알아가고 있다. 시간의 미스터리에 대해서도 우리는 뭔가를 힐끗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없는 세상을 볼 수 있고, 마음의 눈으로 우리가 아는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심오한 구조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신경들의 연결 속 기억의 흔적들에 의해 펼쳐진 초원이다.
우리는 기억이다. 우리는 추억이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갈망이다.
기억과 예측을 통해 이런 식으로 펼쳐진 공간이 바로 '시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시간의 최종적 원천은, 우주 초기 낮은 엔트로피의 특별한 배열 상태를 '희미하게 바라본 우리의 무지'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간이 '열역학적 확률(엔트로피)'에 의해 창발된 현상임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시간의 구조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강력한 변수가 있다. 바로 '중력'이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이 극한으로 휘어지는 지점에서는 열적 시간의 통계적 법칙마저 붕괴된다.

우리는 기억과 엔트로피가 엮어낸 '시간'이라는 따뜻한 초원 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시선을 우리의 뇌에서 우주의 저편으로 돌리면, 이 아늑한 시간의 법칙조차 통하지 않는 기이한 장소가 입을 벌리고 있다. 시간이 멈추고,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로벨리는 시간을 해체한 데서 멈추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다가 다시 튀어 오르는(Bounce)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다. 그곳은 시간이 없는 세상의 가장 적나라한 증거, 블랙홀과 화이트홀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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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로벨리 물리학을 소개하는 동심헌(童心軒)의 기획 시리즈입니다."

🔖 주(註)

1) 이 단락에서 언급된 '해밀토니안'과 '켤레'의 구체적인 개념은 위키피디아 및 관련 물리학 자료를 참고하여 기술하였다.

2) 우변의 수식이 담고 있는 물리적 수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출처: Google. (2025). Gemini (Dec 22 version) [Large Language Model]. "열적 시간과 해밀토니안의 켤레 관계에 대한 물리적 설명"을 재구성.)

이 과정은 해밀토니안(에너지)이 상태(물체)를 만나 시간(변화)을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전자는 지금 두 가지 상태가 섞여 있는(중첩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상태 A (0.6): 에너지 준위가 낮은(2) 상태에 있을 확률 진폭이다.
상태 B (0.8): 에너지 준위가 높은(5) 상태에 있을 확률 진폭이다.
마치 한 사람이 "차분한 자아(에너지 준위가 낮은 기저 상태)(A)"와 "열정적인 자아(들뜬 상태)(B)"를 6:8의 비율로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제 시간의 엔진인 해밀토니안($\hat{H}$)이 전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해밀토니안은 각 상태가 가진 '잠재적 에너지'의 크기만큼 가중치를 부여하는 연산자이다.

해밀토니안은 상태 A를 보고, "너는 고유 에너지가 2구나. 너의 존재감(0.6)에 2배를 곱해 변화를 주겠다."라고 말을 건다.
해밀토니안은 상태 B를 보고, "너는 고유 에너지가 5구나. 너의 존재감(0.8)에 5배를 곱해 훨씬 격렬하게 변화를 주겠다."라고 말을 건다.

이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온 숫자가 바로 1.2와 4.0이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속도에 대한 명령서"이다.

원래는 0.6과 0.8로 비슷한 비율이었지만, 에너지가 개입하자 변화의 강도는 1.2 대 4.0으로, 격차가 3배 넘게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흐르는 원리, 즉 차이가 흐름을 만든다.

만약 모든 상태의 에너지가 똑같았다면(예: 모두 0이라면), 변화의 명령도 똑같거나 없었을 것이고, 전자의 내부 시계는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가 높은 쪽(B)이 낮은 쪽(A)보다 훨씬 더 빠르게 시계바늘을 돌리게 된다.

이 속도 차이 때문에 전자의 내부 파동들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하고, 이 '어긋남(위상의 변화)'이 거시적으로 누적되어 우리가 보는 '물리적 변화'나 '이동'으로 나타난다.

즉, 수식의 우변이 보여준 `1.2`와 `4.0`이라는 숫자는, "에너지가 높은 곳일수록 시간을 더 빨리 감아라"는 해밀토니안의 구체적인 지휘 내용이었던 것이다.

3) 동심헌(童心軒)의 블로그《존재의 연산: 지수의 오만, ∞의 허무, 그리고 생명의 반격》 주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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