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연산: 지수의 오만, ∞의 허무, 그리고 생명의 반격

단순한 사칙연산 문제 속에 숨겨진 우주의 법칙과 삶의 철학을 탐구합니다. 덧셈의 일상을 넘어 곱셈의 혁명, 지수의 비상, 그리고 엔트로피의 허무에 맞서는 생명의 위대한 저항을 나름의 시선으로 풀어냈습니다. 0과 무한의 심연 위에서 춤추는 인간 실존의 의미를 만나보세요

덧셈처럼 세상이 강요한 지루한 나열을 거부하고, 융합, 창조, 확장의 가치를 움켜쥐는 곱셈의 우선순위를 회복하는 것이 수학이 숨겨놓은 혁명의 법칙입니다.(이미지 출처: AI 생성 후 pages 제작)

이 글은 우연히 마주친 한 장의 단순한 논리 퀴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뺄셈과 덧셈이 나열된 숫자의 합을 계산하는 문제인데 괄호치지 않은 그 자연수 속에 사칙연산의 순서를 묻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 단순하고 사소한 틈새에서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우리 삶을 관통하는 법칙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덧셈의 세상에 살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차근차근 줄을 서고, 순서를 기다리며, 어제와 같은 오늘을 쌓아가라고 배웁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본질적인 변화는 언제나 곱셈과 지수의 영역에서 발견합니다. 진정한 힘은 결코 순서대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 융합하고(곱셈), 폭발적으로 확장하며(지수), 차원을 뛰어넘을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나는 '곱셈의 열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곱셈의 비밀을 파헤치다보면 어느새 우주의 운행법칙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엔트로피 법칙이 그것입니다. 이 글은 단순한 수학적 비유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내가 어떻게 ‘유의미한 오답’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일상의 생각입니다.

제1장 팽창의 의지: 곱셈과 지수

곱셈: 융합, 창조, 확장의 가치

첫째, 곱셈은 덧셈보다 더 강한 '결속력'을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칙연산의 순서를 결정하는 객관적 근거가 됩니다.

대수학에서 $2 \times 3$은 본질적으로 $2+2+2$를 압축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항이라는 단단한 덩어리를 형성합니다. 덧셈과 뺄셈이 항과 항 사이를 느슨하게 연결하는 '이음새'라면, 곱셈은 수와 수를 강력하게 본드로 붙여 하나의 정체성으로 융합합니다. 덧셈이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서 있는 '이웃'이라면, 곱셈은 서로에게 깊이 침투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연인'입니다. 그래서 수학의 세계는 뺄셈이라는 이별보다 곱셈이라는 결합에 우선권을 부여합니다.

둘째, 곱셈은 머무르지 않고 세계를 넓히고자 하는 욕망을 가집니다.

기하학에서 길이(1차원)와 길이(1차원)를 더하면 여전히 긴 선(1차원)일 뿐입니다. 하지만 길이와 길이를 곱하면 비로소 면적(2차원)이 탄생합니다. 나아가 높이를 곱하면 부피(3차원)가 됩니다.

덧셈이 어제와 같은 오늘을 쌓아가는 '일상의 반복'이라면, 곱셈은 선형의 세계를 탈출하여 새로운 입체적 공간을 창조하는 '혁명'입니다. 징기스칸의 외부세계를 향한 끊없는 탈주와 닮았습니다.

셋째, 곱셈은 생명 현상과 가장 닮아 있습니다.

세포 분열이나 핵분열 반응은 등차수열(덧셈)이 아닌 등비수열(곱셈)을 따릅니다. $2, 4, 8, 16, 32...$로 이어지는 기하급수적 증가는 자연계에서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거나 에너지가 급증하는 기본 원리입니다. 하나의 난자에 하나의 정자가 붙어 1개의 세포로 시작된 당신의 생명은 약 30조 개의 세포1)로 분열되어 진정한 생명체가 된 것은 이러한 곱셈의 법칙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서 "95%가 실패(Fail)한다"는 문구는 당신의 지능을 비웃는 조롱이 아닙니다. 그것은 '눈앞에 놓인 평온한 순서(덧셈)'에 길들여져, '세상을 뒤바꿀 핵심 동력(곱셈)'을 먼저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진부한 관습에 대한 서늘한 경고입니다.

5%의 기득권은 세상이 마치 얌전한 덧셈의 나열인 것처럼 가장합니다. “순서대로 줄을 서라", "차근차근 하나씩 하라"는 말로 우리를 평면적인 1차원의 세계에 가둡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강력하게 뭉치고(1. 융합), 기존의 판을 뒤집어 새로운 차원을 열고(2. 확장), 폭발적으로 성장하는(3. 증식) 곱셈의 본능을 깨닫는 순간, 그들이 독점해 온 견고한 성벽이 무너질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 삶의 연산 순서를 재설정하십시오. 세상이 강요한 지루한 나열을 거부하고,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가치를 먼저 움켜쥐는 것입니다. 무기력한 덧셈의 굴레를 끊고, 본질을 꿰뚫는 곱셈의 우선순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학이 숨겨놓은 혁명의 법칙이며, 당신이 '실패한 95%'가 아닌 '깨어있는 5%'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수의 오만함: 차원을 찢는 비상지수

'곱셈의 욕망'이 융합과 확장이었다면,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지수의 오만함'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수($a^n$)는 곱셈을 반복하는 연산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단순히 '더 큰 수'가 아니라, 인간의 직관을 비웃고 물리적 한계를 조롱하는 '오만함'의 성격을 띱니다.

지수는 성실한 덧셈과 협력적인 곱셈을 발아래 두고, 홀로 수직 상승하려는 권력의 속성을 가집니다.

첫째, 지수는 수의 세계에서 '자릿수'라는 넘을 수 없는 계급을 만듭니다.

덧셈 세계에서 $1,000$과 $1,001$은 단지 '1'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지수 세계에서 $10^3$(1,000)과 $10^4$(10,000)는 비교 불가능한 차이입니다. 지진의 강도를 나타내는 리히터 규모(로그 스케일)에서 규모 6과 7은 에너지 차이가 32배2)나 납니다.

덧셈이 한 걸음씩 산을 오르는 '도보 여행자'라면, 지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펜트하우스로 직행하는 '권력자'입니다. 지수는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으로 압도하며, 숫자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신분의 격차를 만듭니다.

둘째, 지수는 인간의 뇌가 가진 선형적 사고를 철저히 농락합니다.

$0.1mm$ 두께의 종이를 42번만 반으로 접으면($2^{42}$), 그 두께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384,400km$)를 넘어섭니다.3) 이것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지수는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덧셈의 격언을 비웃습니다. 지수에게 티끌 하나는 순식간에 우주를 덮는 재앙이 되거나, 별이 됩니다. 이것은 겸손을 미덕으로 아는 인간에게 던지는 수학의 가장 오만한, 우리 인간의 직관을 조롱합니다.

셋째, 지수는 밑이나 지수가 아주 조금만 변해도 결과값을 통제 불능 상태로 만듭니다.

바이러스의 전파가 이에 해당합니다. 감염 재생산지수(R)가 1.0에서 1.5로 아주 조금만 올라도, 감염자 그래프는 완만한 언덕에서 수직 절벽으로 변합니다.4)

지수는 타협하지 않는 폭군입니다. 아주 작은 차이를 용납하지 않고 극단적인 결과로 되돌려줍니다. 덧셈이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자비로운 신이라면, 지수는 작은 실수 하나로 왕국을 멸망시키는 냉혹한 심판자입니다.

곱셈이 이웃과 손을 잡고 '넓어지려는 욕망'이었다면, 지수는 타인과의 연결을 끊고 홀로 '높아지려는 오만함'입니다. 그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로켓처럼, 현실의 규칙을 찢고 나아갑니다.

제2장 심연의 두 얼굴: 0(Zero)과 무한

숫자 0: 파괴의 본능

앞선 '곱셈의 욕망'과 '지수의 오만함'이 무언가를 쌓아 올리고 확장하려 했다면, '0(Zero)'은 그 모든 노력을 단숨에 무(無)로 돌려버리는 '파괴적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0은 단순히 '비어있음'을 의미하는 수동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0은 존재를 집어삼키고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가장 공격적인 수입니다.

첫째, 정체성의 말살입니다. 0은 자신의 곁에 다가오는 모든 수의 고유한 가치를 지워버립니다.

곱셈에서 어떤 수($N$)에 0을 곱하면 결과는 무조건 0이 됩니다 ($N \times 0 = 0$). 1억이든 1이든, 0과 만나는 순간 그 크기와 역사, 정체성은 즉시 소멸합니다. 이는 정보 이론에서 볼 때, 입력값이 무엇이었는지 역추적할 수 없게 만드는 '정보의 파괴'에 해당합니다.

0은 자비 없는 '포식자'입니다. 덧셈의 항등원인 0($N+0=N$)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거울'이라면, 곱셈의 0은 상대를 자신과 똑같은 어둠으로 만들어버리는 '블랙홀'입니다. 0 앞에서는 왕도 거지와 동등하게 '없음'이 됩니다. 이것은 가장 강력하고 폭력적인 평등입니다.

둘째, 인과율의 붕괴입니다. 0은 나눗셈의 분모에 위치함으로써 논리의 구조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수학에서 '0으로 나누기'는 정의되지 않습니다. 어떤 수를 0으로 나누려 하면 그 값은 수학적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극한의 개념에서는 무한대로 폭주하거나($\infty$), 논리적 모순에 빠집니다. 물리학적으로 이는 부피가 0이 되면서 밀도가 무한대로 치솟는 '특이점'을 의미하며, 이곳에서는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습니다.

0은 세계를 지탱하는 규칙을 찢어버리는 '반역자'입니다. 다른 숫자들은 규칙 안에서 움직이지만, 0은 규칙의 밑바닥(분모)에 숨어들어 시스템 전체를 '오류' 상태로 만듭니다.

셋째, 시간의 동결입니다. 물리학에서 0은 모든 움직임과 시간마저 멈추게 하는 죽음의 상태입니다.

절대영도(0 Kelvin, $-273.15^\circ C$)는 물질의 엔트로피가 0이 되고, 원자의 진동이 멈추는 이론적 한계점입니다. 열역학적으로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곧 시간의 흐름이 의미를 잃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0은 우주의 마지막 모습인 '침묵'을 상징합니다. 덧셈과 곱셈이 에너지를 교환하며 생명을 노래할 때, 0은 그 모든 소란을 잠재우고 영원한 정적을 강요합니다. 그것은 완벽하게 차갑고, 완벽하게 조용한 죽음입니다.

0은 아무것도 없는 평화로운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수(존재)를 자신과 동화시키고, 세상의 법칙을 거부하며, 끝내 모든 움직임을 멈추게(절대영도) 하려는 근원적인 파괴의 욕망'입니다.

무한대: 끝없는 허무

"0"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파괴자'였다면, 무한대($\infty$)는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허무'입니다.

인간은 흔히 무한을 '모든 것을 가진 상태'로 동경하지만, 수학적·과학적 시각에서 본 무한대는 목적지의 상실이자 가치의 소멸입니다.

무한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는 정체 상태를 의미합니다. 무한의 세계에서는 어떤 성취를 더해도 '전과 다름없는 상태'일 뿐입니다. 그것은 산 정상에 돌을 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영원히 제자리걸음 하는 지옥과 같습니다.

무한에 어떤 유한한 수($N$)를 더하거나 빼도 결과는 여전히 무한입니다 ($\infty \pm N = \infty$). 1을 더하든 1억을 더하든 무한대라는 상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무한대는 '크다/작다'라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무너뜨려 모든 것을 평범하게 만듭니다. 비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가치가 실종합니다. 희소성'에 기반한 가치 체계를 붕괴시킵니다.

모든 것이 무한하다면, 그 무엇도 귀하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무한대라면 그것은 길바닥의 돌멩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무한대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소중함의 상실'입니다. 차이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열정도, 질투도, 욕망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텅 빈 허무만 남습니다.

무한대는 도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영원히 다가기만 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무한은 수가 아니라 커져가는 상태이므로, 우리는 결코 '무한'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무한대는 '영원한 미완성'입니다. 그것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지만, 1미터를 가면 1미터 멀어지는 신기루입니다. 결말을 맺지 못하는 소설, 마침표가 없는 문장처럼, 무한대는 영원히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 '방랑의 저주'입니다.

0이 '존재의 죽음'이라면, 무한대($\infty$)는 '의미의 죽음'입니다. 아무리 더해도 변하지 않고, 아무리 가져도 특별하지 않으며, 아무리 가도 닿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꽉 차 있어서 오히려 텅 비어버린 허무입니다.

무한이 있다면 그것은 무지(無知, ignorance)입니다.

제3장 반전의 물리학: 플랑크 길이와 빅 바운스

그렇다면 우리는 무한히 작아져 소멸할 운명인가? 현대 물리학은 여기서 극적인 구원을 제시합니다.

플랑크 길이($1.616 \times 10^{-35}m$)라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플랑크 스케일'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한소의 늪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우주는 픽셀처럼 단단한 알갱이로 이루어진 실재입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픽셀처럼 단단한 알갱이"를 양자화된 공간(최소한의 공간)으로 설명합니다. 이 문제는 양자중력이론에서 다룹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바닥은 존재합니다. 우주가 '플랑크 스케일'에 닿는 순간, 추락은 멈춥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절망의 끝에서 우주는 소멸하는 대신, 무한히 작아지는 허무함은 '플랑크 스케일'이라는 한 공간에 멈춥니다. 그곳에서 그동안 응축된 에너지를 폭발시켜 반대 방향으로 튀어 오릅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자신의 저서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김정훈 옮김, 쌤앤파커스, 2018)에서 "양자역학을 고려하면, 우주가 한없이 붕괴될 수는 없다. 수축하는 우주는 어떤 한 점으로 내려앉지 않고 양자의 반발력으로 되튀어(Bounce) 마치 우주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팽창하기 시작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우주적 반등을 빅 바운스(big bounce)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아직 확증되지 않는 '가설'로만 머물러 있습니다.

무한대($\infty$)와 0은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입니다. 하지만 세계는 이 허상에 갇히지 않습니다. 비록 가설이지만, 우주는 '공간의 양자'라는 픽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최소 단위입니다.

이 실재의 의미는 우리 존재가 무한소로 사라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한히 희석되는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니라, 플랑크 단위의 격자 위에 단단히 뿌리박은 최소단위 알갱이들로 이루어진 실재입니다.

제4장 시간의 저주와 생명의 반란

시간의 저주: 엔트로피

우리는 무한의 허무함을 플랑크 길이와 빅 바운스라는 '탄성적 희망'으로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이 희망찬 순환의 우주조차도 가장 두려워하는 단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엔트로피(Entropy)라는 잔인한 화살"입니다.

모든 물리 법칙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t \rightarrow -t$) 성립합니다. 하지만 오직 엔트로피만이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명령합니다. 이 비가역성이 품은 잔인한 속성은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회귀의 금지입니다. 엔트로피는 한 번 일어난 일을 결코 되돌릴 수 없게 만듭니다.

엎질러진 물이 다시 컵 속으로 저절로 모여들 확률은 0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확률은 우주의 나이보다 긴 시간을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희박합니다. 상태(default)의 수가 적은 '질서'에서 상태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무질서'로 이동하는 것이 엔트로피 법칙입니다.

엔트로피는 '용서받지 못하는 시간'입니다. 깨진 유리잔, 뱉어버린 말, 지나간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덧셈이나 곱셈은 역연산(뺄셈, 나눗셈)을 통해 원래의 수로 돌아갈 수 있지만, 엔트로피는 'Ctrl+Z(실행 취소)'가 없는 우주의 냉혹한 시스템(법칙)입니다.

둘째, 차이의 말살입니다. 엔트로피는 세상의 모든 특별함과 구별을 없애고, 미지근한 평형으로 만듭니다.

뜨거운 커피는 식고, 차가운 얼음은 녹습니다. 에너지는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결국 평형 상태에 도달합니다. 우주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면, 더 이상 에너지는 흐르지 않고 별들은 모두 꺼집니다. 이를 '열역학적 죽음'이라 합니다.

엔트로피는 '개성의 파괴자'입니다. 뜨거운 열정도, 차가운 이성도 결국은 구별 없는 미지근한 잿더미가 됩니다. 산맥은 깎여 평지가 되고, 화려한 문명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엔트로피의 화살 끝에는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진, 완벽한 평형상태가 됩니다.

셋째, 엔트로피 증가는 질서 있는 정보(구조)를 무의미한 소음(Noise)으로 바꿉니다. 기억은 풍화되어 사라집니다. 모든 정보가 사라집니다.

질서도가 낮아진다는 것은 시스템이 가진 정보량이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도서관이 불타 재가 되면, 질량은 보존되지만 책 속에 담긴 '정보(배열)'는 영원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블랙홀이 정보를 삼키고 호킹 복사로 증발할 때 정보가 보존되는지 사라지는지는 여전히 물리학의 최대 난제(정보 역설)입니다.

엔트로피는 '망각의 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필사적으로 쌓아 올린 기록과 기억을 서서히 지워버립니다.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되었다가, 마침내 침묵이 됩니다. 엔트로피는 우리가 우주에 남기려는 모든 의미를 무의미한 잡음으로 되돌리버립니다.

빅 바운스가 우주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는 있어도, 엔트로피의 화살은 그 과정에서 "이전의 나"를 지워버립니다. 엔트로피는 "너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모든 기억을 잃을 것이며,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잔인한 저주와도 같습니다.

생명의 반란: Negentropy(음의 엔트로피)

그럼에도 이 잔인한 엔트로피의 화살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는 있습니다. "생명이 가진 '음의 엔트로피(Negentropy)'입니다.

우주가 엔트로피(무질서)의 늪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운명이라면, 생명은 그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유일하고도 처절한 '반란군'입니다.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그의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 에서 생명이 '음의 엔트로피(Negentropy)'를 섭취함으로써 죽음(평형 상태)으로의 추락을 지연시킨다고 통찰했습니다.5) 엔트로피의 잔인한 화살에 맞서는 생명의 저항 전략을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합니다.

첫째, 생명은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환경으로부터 고도로 정돈된 질서를 '약탈'하여 자신의 몸을 유지합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고립계'에서만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생명은 에너지가 드나드는 '개방계(Open System)'입니다.

식물은 태양의 고품질 에너지(낮은 엔트로피)를 흡수하여 포도당이라는 질서 있는 분자를 합성하고, 동물은 그 식물을 먹습니다. 그리고 쓸모없어진 저품질 에너지(열, 노폐물)를 밖으로 배출합니다. 즉, 생명은 주변 환경의 엔트로피를 급격히 높이는 대가로 내 몸의 엔트로피를 낮게 유지합니다.

특히 인간은 엄청난 양의 화석연료를 태우며 자신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대신 지구의 엔트로피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엔트로피를 빠르게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흩어져 있는 '질서'를 긁어모아 내 몸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필사적인 방어전략입니다.

둘째, 엔트로피는 정보를 소음(Noise)으로 만들려 하지만, 생명은 DNA라는 디지털 코드를 통해 정보를 지켜냄으로써 자신은 물론 후손들에게도 엔트로피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합니다.

DNA는 복잡하지만 엄격한 규칙을 가진 정보 저장소입니다. 생명체는 효소를 이용해 DNA 복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엔트로피 증가)를 끊임없이 수선합니다. 이는 자연계의 무작위성에 대항하여 '의미'를 보존하려는 가장 정밀한 메커니즘입니다.

DNA는 불타는 도서관에서 책을 필사하는 '수도승'과 같습니다. 밖에서는 폭풍(엔트로피)이 몰아치고 모든 것이 잊혀 가지만, 세포의 핵 안에서는 수십억 년 전의 기억(유전 정보)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음 세대로 전달됩니다. 이것은 시간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거입니다.

셋째, 생명은 엔트로피를 완전히 이길 수 없습니다. 대신,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는 서퍼처럼 '동적 평형'을 유지합니다.

생명체가 죽으면 그 즉시 체온은 주변 온도와 같아지고(평형), 육체는 흙으로 분해됩니다(최대 엔트로피).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하여 이 '평형 상태'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물리학적으로 삶은 '평형에서 멀어진 상태'를 유지하려는 불안정한 곡예입니다.

생명은 엔트로피에 저항하려는 몸부림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떠내려가기에, 생명은 쉼 없이 헤엄쳐야 합니다. 결국 생명은 동적 평형을 유지할 뿐 언젠가 엔트로피에게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 패배의 순간까지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몸부림은 그래도 '아름다운 노래'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생명에게 음의 엔트로피는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변을 더 어지럽히는 대가로 잠시 동안 나만의 질서를 구축하는 '숭고한 투쟁'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우주는 붕괴하려 하고, 생명은 그 속에서 버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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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우리는 이제 수학적 은유로 시작해 우주론적 비극을 거쳐, 마침내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인간 실존의 의미로 귀결되었습니다. 거쳐온 연산의 길을 간략히 요약해봅니다.

곱셈은 고립된 개체들이 서로 융합하여 더 거대한 하나가 되려는 '결속의 욕망'입니다. 덧셈이 나란히 서 있는 이웃이라면, 곱셈은 서로에게 침투하여 차원을 확장하는 혁명입니다. 그 위에는 지수($a^n$)가 군림합니다. 지수는 선형적인 성장을 비웃으며 우주적 규모로 치솟으려는 '오만의 알고리즘'입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0(Zero)이라는 포식자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0은 모든 수를 자신과 동화시켜(곱셈) 침묵하게 만들고, 시스템의 규칙을 붕괴(나눗셈)시키는 '파괴적 본능'을 갖습니다. 0이 끌어당기는 절대적인 '없음'의 중력, 그것이 모든 존재가 직면한 최초의 공포였습니다.

0을 피하여 도망친 곳에는 무한대($\infty$)라는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립니다. 무한은 아무리 채워도 변하지 않는 시지프스의 형벌'이며, 모든 가치를 희석시키는 '의미의 죽음'입니다. 끝없이 작아지는 추락에는 바닥이 없고, 끝없이 팽창하는 공간에는 중심이 없습니다.

이 절망적인 무한의 감옥을 부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한계가 있다'입니다. 현대 물리학은 그 한계로 '플랑크 스케일'이라는 우주의 최소 단위를 제시합니다. 공간은 무한히 쪼개지지 않는 단단한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덕분에 우주는 0으로 수렴하여 소멸하지 않고, 그 단단한 바닥을 딛고 다시 튀어 오릅니다(Big Bounce).

플랑크 스케일 덕분에 우리는 무한의 늪에 빠지지 않고 다시 태어났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피할 수 없는 저주가 흐릅니다. 바로 엔트로피입니다. 시간은 오직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흐릅니다. 이것은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게 하는 '후회의 금지'이며,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성을 모두 미지근한 재로 만드는 '열적평형의 죽음입니다.

그래도 이 잔인한 화살비 속에서 기적 같은 반란군이 등장합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슈뢰딩거의 통찰대로, 생명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무질서를 낮추는 '음의 엔트로피'(빛 에너지, 탄수화물, 포도당 등) 얻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엔트로피가 모든 기억을 지우려 할 때, 생명은 DNA라는 방주에 정보를 싣고 시간의 파도를 넘습니다. 우리는 소멸에 저항하기 위해 질서를 구축하는 '동적 평형'의 곡예사입니다.

제5장 존재의 확장: 사랑과 문명

우리는 0의 허무를 거부하고, 무한의 공허를 딛고 서서, 필연적인 종말 앞에서도 기어이 자신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생명의 한 종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우주가 저지른 가장 '아름답고 치열한 오류'입니다. 엔트로피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간은 더 큰 반역의 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하나는 내면으로 향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 뻗어 나가는 문명입니다.

사랑: 고독의 엔트로피에 맞서는 '강력(Strong Force)'

물리학적으로 볼 때, 개체와 개체가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이 자연스러운 분리를 거부하고 서로를 묶으려는 '반(反)엔트로피적 결속'입니다.

수학에서 $1+1=2$는 단순히 나란히 서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1 \times 1 = 1$이 되기를 갈망하는 곱셈의 연산입니다.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고유한 자아를 섞어(Melting) 새로운 하나의 우주가 되려는 시도입니다. 이는 원자핵을 묶어두는 '강한 상호작용처럼, 인간이라는 입자가 서로 멀어지려는 고독의 척력을 억지로 붙잡아두는 '강력'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닫힌계의 온도는 결국 평형(미지근함)에 도달합니다. 관계의 권태, 식어버린 열정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사랑은 저절로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장작(에너지)을 넣어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비평형 상태의 유지'입니다. "사랑이 식었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우리가 엔트로피에 굴복하여 "에너지 투입을 멈췄다"고 해야 옳습니다.

문명: 시간의 풍화에 맞서는 '기하학적 반란

문명은 자연 상태의 무질서(Chaos) 위에 인간의 의지로 강제로 새겨 넣은 '질서의 구축'입니다. 이것은 엔트로피가 지배하는 시간의 화살을 꺾으려는 집단적 저항입니다.

자연은 곡선과 프랙탈(무작위성)을 선호하지만, 문명은 직선과 직각(기하학)을 세웁니다. 피라미드부터 마천루까지, 모든 건축물은 중력과 풍화작용이라는 자연의 힘을 거스르기 위해 인간이 세운 '인공적인 뼈대'입니다. 즉, 흙으로 돌아가려는 물질을 붙잡아 시멘트와 철근으로 고정시켰습니다. 도시는 엔트로피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네게트로피(Negentropy)의 섬'입니다.

문명은 도서관, 데이터 센터, 언어, 법률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기억을 보존합니다. 동물의 죽음은 육체의 소멸로 끝나지만, 인간의 죽음은 문명이라는 거대한 하드디스크에 데이터를 남김으로써 '정보적 영생'을 획득합니다. 역사는 망각(엔트로피 증가)이라는 우주의 지우개에 맞서 펜을 쥔 인간의 투쟁이었습니다.

결국 사랑은 '너와 나'라는 분리를 극복하려는 감정의 물리학이고, 문명은 '삶과 죽음'이라는 시간의 한계를 넘으려는 집단의 수학입니다.

우주가 아무리 우리를 0(무)으로 되돌리려 해도, 우리는 곱셈(사랑)으로 서로를 묶고 구조(문명)를 세워 버티고 있습니다. 설령 언젠가 태양이 꺼지고 모든 것이 흩어질지라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문명을 유지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화살(엔트로피)에 대한 반역입니다.

제6장 반역의 환상: 승리는 언제나 엔트로피

'제5장 존재의 확장'은 인간의 투쟁을 아름다운 서사시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한 물리학적 잣대를 들이대면, 그 모든 '반역'은 사실 엔트로피의 승리를 앞당기는 가속 행위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우주는 인간의 반란을 진압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인간이 발버둥 칠수록, '우주의 목적(무질서의 증가)'은 더 빨리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 우주 자체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엔트로피의 화살은 마치 '모든 존재는 사라진다'는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우리를 그 예정된 종말을 향해 등 떠밉니다.

사랑: 유전자의 기만술과 호르몬의 유통기한

앞에서 사랑을 '고독의 엔트로피에 맞서는 결속'이라고 미화했습니다. 그러나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의 관점에서 사랑은 낭만이 아닌, 유전자의 생존 기계가 수행하는 '화학작용'일 뿐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도파민(쾌락), 페닐에틸아민(흥분), 옥시토신(애착)의 칵테일 효과입니다. 문제는 이 신경전달물질 수용체가 시간이 지날수록 '내성(Tolerance)'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뇌과학적으로 열정적인 사랑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18개월에서 30개월입니다.(중앙일보, 2005.3.13.)

사랑은 '영원한 결속'이 아니라, 번식이라는 과업을 달성할 때까지만 유지되도록 설계된 '일회용 버너'입니다.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넘기는 순간, 자연은 연인 간의 결속에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랑은 엔트로피를 이긴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가 '번식'을 위해 잠시 빌려준 옥시토신일 뿐입니다. 그 호르몬이 떨어지면 권태(평형 상태)는 필연적으로 찾아옵니다.

문명: 사실상 엔트로피 생산 공장

문명을 '엔트로피의 바다에 뜬 질서의 섬'이라고 칭송한 것은 열역학 제2법칙의 절반만 본 것입니다. 문명은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무질서를 폭발적으로 가속화시키는 기계입니다.

질서(도시, 문명)가 유지되려면 외부로 엄청난 양의 엔트로피(열, 쓰레기, 오염, 심지어 편견과 혐오의 언어까지)를 배출해야 합니다. 인류가 빌딩을 세우고 에어컨을 틀어 '내부의 질서'를 잡을 때, 발전소는 화석연료를 태워 대기 중의 무질서(탄소 농도)를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높입니다.

인간은 엔트로피의 저항군이 아니라, '엔트로피의 충실한 하수인'입니다. 자연 상태로 두면 수억 년 걸려 분해될 석유와 석탄을, 인간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단 몇 백 년 만에 태워버렸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빨리 식고 싶고, 빨리 섞이고 싶은 욕망"을 대행해 주는 가장 효율적인 촉매제일 뿐입니다.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지구의 엔트로피 시계는 더 빨리 돌아갑니다.

우주: 빅 바운스는 없다, 영원한 고립만 있을 뿐

'플랑크 길이'와 '빅 바운스'를 통해 부활을 이야기했지만, 이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입니다. 현재 관측된 데이터가 가리키는 우주의 미래는 훨씬 더 어둡고 차갑습니다.

일부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1998년 이후의 정밀 관측 결과, 우주는 팽창 속도가 줄어들기는커녕 '가속 팽창'하고 있습니다. 암흑 에너지의 힘은 중력을 압도하여 은하들을 서로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 공로로 '가속팽창' 이론은 201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합니다. (연합뉴스, 2011.10.4.) 우주가 다시 수축하여 바운스 할 확률보다, 영원히 찢어져 나갈 확률(혹은 Big Freeze)이 훨씬 높습니다.위키피디아

우주는 심장처럼 뛰는 것이 아니라,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입니다. 결국 모든 별은 연료를 다 쓰고 중력을 못 이겨 붕괴될 것이며, 은하들은 서로의 빛이 닿지 않을 만큼 멀어질 것입니다. 정보도, 사랑도, 문명도, 이 절대적인 차가움 속에서 각자 고립되어 얼어붙을 것입니다. 이것이 관측된 데이터가 말하는 가장 유력한 결말입니다.6)

"정말 그럴까요? 플랑크 길이는 무한($\infty$)의 붕괴를 거부합니다. 블랙홀의 심연, 그 극한의 밀도 속에는 소멸이 아니라 '플랑크 별'이 숨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에서 다시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화이트홀이 열려 새로운 우주가 튀어 나오지 않는다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허무는 극복 대상이 아니라, 최종 상태(default)이다.

엔트로피에 대한 '인간의 저항'은 거대한 사막에 물 한 컵을 쏟는 행위와 같습니다. 잠시 모래가 젖어 색이 변할 수는 있겠지만, 태양(엔트로피)은 그 물기를 순식간에 증발시키고 다시 건조한 침묵으로 덮어버릴 것입니다. 물론 태양의 빛은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개방계'의 에너지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쌓은 탑은 무너지고, 우리가 나눈 사랑은 잊힙니다. 엔트로피는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곳이자, 결국 돌아가야 할 '유일한 고향'입니다. 종국에는 '열적평형 상태(Heat Death)'에 이르게 됩니다.

제7장 결론: 관찰자의 특권

이제 우리는 희망과 절망의 충돌 끝에, 제3의 진실에 도달합니다.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과정이 무의미한가?"

곱셈의 도약, 지수의 폭발적 상승, 0(zero)의 파괴, 무한대의 허무, 비가역적 시간의 화살인 엔트로피까지 이 모든 것은 숫자가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현상을 숫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태초부터 존재하던 우주의 엄연한 법칙들입니다. 우주의 현상을 단지 과학이라는 인간의 언어로 그 질서를 읽어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장엄한 과정을 목격할 '관찰자의 특권'을 가졌습니다.

$2 - 2 = 0$이라 해서 중간에 있던 2가 없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결과가 무(無)로 돌아갈지라도, 우리가 사랑하고 문명을 세웠던 그 순간의 치열함은 우주라는 캔버스에 가장 선명한 그림을 남겼습니다.

대다수(95%)는 눈앞의 덧셈에 갇혀 순서대로 줄을 서다가 소멸할 것입니다. 하지만 깨어있는 5%는 '곱셈의 창조성'을 봅니다.

그들은 흩어진 것을 융합하고, 차원을 확장하며, 무기력한 나열을 거부합니다. 이 결속의 욕망은 지수의 오만함을 조롱하고, 0(제로)의 파괴와 무한의 허무를 극복합니다. 사랑과 문명으로 '반역의 탑'을 세워 존재를 확장합니다. 그것은 이제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슈뢰딩거가 말한 '음의 엔트로피'가 됩니다.(끝)


🔖 주(註)

1)"In total, we estimate total body counts of ≈36 trillion cells in the male, ≈28 trillion in the female, and ≈17 trillion in the child."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303077120

2) 지진의 규모(Magnitude, $M$)와 에너지($E$)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공식은 구텐베르크-리히터 법칙을 따른다고 합니다. 규모가 1 증가할 때 에너지가 왜 약 32배($10^{1.5}$배)가 되는지 보여주는 계산식입니다.
지진의 에너지($E$)와 규모($M$)의 관계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로그는 상용로그 $\log_{10}$입니다.)
$\log E = 11.8 + 1.5M$
규모 6과 7의 에너지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규모 6일 때의 에너지 ($E_6$) $\log E_6 = 11.8 + 1.5 \times 6$
2단계: 규모 7일 때의 에너지 ($E_7$) $\log E_7 = 11.8 + 1.5 \times 7$
3단계: 두 식의 차이 계산 (에너지 비율 구하기)
위의 식(2단계)에서 아래 식(1단계)을 뺍니다.
$\log E_7 - \log E_6 = (11.8 + 1.5 \times 7)$
$- (11.8 + 1.5 \times 6)$
상수($11.8$)는 사라지고, $1.5$로 묶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log \left( \frac{E_7}{E_6} \right) = 1.5 \times (7 - 6)$
$\log \left( \frac{E_7}{E_6} \right) = 1.5$
이제 로그를 풀어 에너지의 비율($\frac{E_7}{E_6}$)을 구합니다.
$\frac{E_7}{E_6} = 10^{1.5}$
$10^{1.5}$는 $10^1 \times 10^{0.5}$와 같으므로, 루트($\sqrt{}$)를 씌워 계산합니다.
$10^{1.5} = 10 \times \sqrt{10}$
$\sqrt{10}$은 약 $3.162$입니다.
$10 \times 3.162... \approx 31.62...$
따라서 규모가 1 증가하면 에너지는 약 31.6배, 반올림하여 통상 32배 차이가 난다고 말합니다.
※ 지진규모 지수 1 증가했을 때 에너지 양을 계산하는 식은 구글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3) 종이를 한 번 접을 때마다 두께는 2배가 됩니다. 따라서 $n$번 접었을 때의 최종 두께($T$)는 등비수열의 항을 따릅니다. $T = t_0 \times 2^n$
먼저 2를 42번 곱한 값이 얼마나 거대한지 확인합니다. $2^{42} = 4,398,046,511,104$(약 4조 3,980억 배). 이 거대한 수에 종이의 두께 $0.1mm$를 곱합니다. $T_{mm} = 0.1mm \times 4,398,046,511,104$, $T_{mm} = 439,804,651,110.4mm$
인간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단위를 킬로미터($km$)로 변환합니다.
($1km = 1,000m = 1,000,000mm$)
$T_{km} = \frac{439,804,651,110.4}{1,000,000} km$
$T_{km} \approx 439,804.65 km$
이제 계산된 종이 두께와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비교합니다.
지구 $\leftrightarrow$ 달 거리: $384,400 km$,
42번 접은 종이 두께: $439,804 km$, $439,804 km - 384,400 km = 55,404 km$
42번 접은 종이는 달에 닿고도 약 $55,404km$를 더 뻗어 나갑니다. 이는 지구 둘레($40,075km$)를 한 바퀴 더 감고도 남는 거리입니다.
$0.1mm$의 미미한 존재가 지수($2^{42}$)라는 날개를 달았을 때, 단 42번의 도약만으로 우주적 거리를 정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앞서 논했던 '지수의 오만함'이 가진 물리적 실체입니다.

4) 감염 재생산지수($R$)의 기하급수적 차이
초기 감염자가 1명일 때, 20세대(Generation) 후의 신규 확진자 수 비교:
$R=1.0$일 때: $1 \times 1.0^{20} = 1$명 (현상 유지)
$R=1.5$일 때 $1 \times 1.5^{20} \approx 3,325$명 (통제 불능)
단 0.5의 차이가 20단계 후에는 3,000배가 넘는 격차를 만들어냅니다.

5) "유기체는 환경으로부터 계속하여 음의 엔트로피를 얻어야 죽음에서 멀리 벗어나, 즉 살아 있을 수 있다. 음의 엔트로피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유기체가 먹고사는 것은 음의 엔트로피이다. 대사과정의 핵심은 유기체가 살아가는 동안 생성할 수밖에 없는 모든 엔트로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서인석 외 옮김, 한울, 2001, 147~148쪽)

6) 그러나 최근 한국의 연구팀이 우주팽창 이론을 반박하는 논문을 영국 왕립천문학회지에 게재하였습니다. 우주는 더 이상 가속 팽창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속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헤럴드경제, https://biz.heraldcorp.com/article/10594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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