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여정에서 우리는 시공간이 고정된 무대가 아니라 '공변 양자장'이라는 역동적인 관계망임을 확인했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관계망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시간($t$)'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공간이 양자화된 세계에서 시간도 사라졌다. 공간과 시간이 하나가 된 시공의 세계만 존재한다. 이 세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기존의 관념들은 해체된다.
양자중력은 이러한 시간이 없는 세상을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물리학의 한 분야이다. 시간의 양자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카를로 로벨리가 평생에 걸쳐 탐구해온 연구의 핵심 주제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이러한 양자중력 연구에서 축적된 사유의 결과물에 가깝다.
시간이 주제인 이번 장 '⑳ 시간 파헤치기'과 다음 장 '㉑ 시간의 원천 ― 엔트로피, 관점, 그리고 기억'은 로벨리의 저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전개한다.
이 책의 출발점은 단순한 질문이다.
시간은 정말로 흐르는가?
로벨리는 시간의 특징적인 양상들 하나하나가 우리의 시각이 만든 오류와 근사치들의 결과물임을 논증한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조들, 즉 층위들이 복합적으로 모인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바로 이 구조적 중첩의 결과물이다.
로벨리는 물리학 연구가 진행되면서 시간의 이 층들을 하나둘씩 잃어왔다고 주장한다. 총 4개의 층위가 상실되었고, 결국에는 하나의 시간, 즉 양자의 시간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로벨리는 유일함의 상실, 방향성의 상실, 현재는 없다, 독립성의 상실 총 4개의 기존 시간 개념을 해체하고 루프 양자중력에 이르러서는 시간조차도 양자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시간의 상대성: 유일함의 상실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평지에서는 더 느리게 흐른다. 시계는 탁자 위에 놓았을 때보다 바닥에 두었을 때 솜털만큼 더 느리다. 따라서 산에서 사는 친구보다 평지에서 사는 친구가 덜 늙는다. 믿기 힘든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어떤 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어떤 곳에서는 빨리 흐른다.
이렇게 시간이 지연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인물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물체가 떨어지는 것도 이러한 시간의 지연 때문이다.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곳, 예를 들어 행성 사이의 공간에서는 물체가 추락하지 않고 떠 있다. 사물이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아래쪽일수록 시간이 지구 때문에 느려지기 때문이다. 발 쪽의 시간은 머리 쪽의 시간보다 더 천천히 흐른다.
그러므로 시간의 절대성이란 없다. 시간의 공간 속 모든 지점마다 시간이 존재한다.
특별한 시계가 특별한 현상 속에서 측정한 시간을 물리학에서는 ‘고유시간(proper time)’이라고 부른다. 모든 시간에는 각자의 고유 시간이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도 고유 시간, 고유의 리듬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고유 시간들이 어떻게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발전하는지를 설명하는 특수상대성이론에서 가르쳐줬다. 우리는 이 시간 지연에 대해서 이전 글(⑤ 로런츠 변환으로 읽는 시간과 공간)에서 살펴본 바 있다.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은 고유 시간과 좌표 시간의 관계를 통해 운동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정량적으로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두 가지 사건 사이에, 예를 들어 두 시계가 멀리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되기까지 경과된 시간은 하나가 아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물리학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 ‘시간들’이 서로 어떻게 다르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즉, 시간은 첫 번째 층인 유일함을 상실했다. 모든 장소의 시간은 다른 리듬과 속도를 갖는다. 다양한 리듬의 춤 속에서 세계의 사건들이 얽힌다.
열역학적 시간: 시간의 방향성 상실
시간은 양쪽 영역으로 똑같이 뻗은 선이 아니라 끝부분이 서로 다른 화살표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핵심이다.
시간의 화살표는 열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 시간과 열은 아주 깊은 관계에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때 열이 관여한다. 열이 있는 곳에서만 과거와 미래가 구분된다.
독일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는 ‘열이 역행 없이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상황을 측정하는 양’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고 그리스어로 ‘엔트로피(entropy)’라는 명칭을 붙였다. 엔트로피는 측정 및 계산이 가능한 양으로 문자 $S$로 표시하며, 증가하거나 균일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고립된 계에서 ‘절대 감소하는 일은 없다’.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Delta S \geq 0$ (델타 $S$ 는 0과 같거나 그 이상이다.'라고 읽고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부른다.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열은 뜨거운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 쪽으로만 이동하고 그 반대로는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법칙의 내용이다.
열은 분자들이 일으키는 미세한 동요다. 뜨거운 차는 분자들이 매우 심하게 동요하는 상태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은 물컵을 관찰하다가 원자와 분자가 격렬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해냈다.
분자들의 동요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다. 일부 분자들이 멈춰 있는 상태라도, 다른 분자들의 격렬한 움직임에 의해 요동이 일어나고, 이 분자들의 요동은 확장되면서 서로 충돌하고 밀어낸다. 그래서 차가운 물체가 뜨거운 물체와 접촉하면 가열되는 것이다. 멈춰 있던 차가운 물체의 분자들이 요동치는 뜨거운 물체의 분자들과 부딪히면서 움직이기 시작해 열이 오른다. 하지만 열은 분자들의 뒤섞임에 의해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이동할 뿐 그 반대로는 이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의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기본적인 운동 법칙이나 심오한 자연의 문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점점 사라지는 것에 있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현상을 관찰해보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이유가 분자들이 요동치면서 전체적으로 무질서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한 묶음의 카드 중 윗부분의 26장은 모두 붉은색이고, 아랫부분의 26장은 모두 검은색이라면, 우리는 이 카드들이 ‘특별’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질서’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질서는 카드 전체를 섞으면 사라진다. 이 질서 정연한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구성이다. 이 구성은 붉은색과 검은색, 이 두 가지 카드 ‘색상’을 기준으로 하면 특별하다. 우리 눈에 색이 두드러지게 보이므로 특별하다.
하지만 모든 카드를 섞어서 다 구별하면 구성은 전부 동등해진다. 어느 것이 더 특별하다거나, 어느 것은 덜 특별하지 않다. 이제 세상은 희미하게 보인다.
이처럼 볼츠만은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열과 엔트로피,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 등은 자연을 대략 통계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이 희미함과 깊이 연결돼 있다.
엔트로피는 우리가 직접 관찰하지 못하는 미시 상태들의 수를 통계적으로 묶어낸 값이다. 우리의 시각이 거칠기 때문에(“희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시적 세계의 복잡성을 한 눈에 보지 못하고, 그 결과를 통계적 평균으로 설명할 뿐이다.
하지만 사물의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진다. 가열되는 물 분자를 보라. 어느 분자가 먼저 요동을 일으켰고, 어느 것이 나중에 가열되었는지 알 수 있나? 끓는 물 분자들 속에 과거와 미래를 구분할 수 있나? 이런 미시적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없어진다. 우리는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말을 자주하지만, 이것이 바로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결국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우리 자신의 희미한 시각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을 거시적 상태(압력, 온도, 에너지 등)로만 파악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미시적 가능성을 놓치며, 그 “희미함”이 시간의 비대칭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시간은 또 다른 본질적인 부분을 잃었다. 바로 과거와 미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다. 즉 미시적인 상태에서는 구분이 없고 단지 희미한 거시적 차원에서만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생긴다. 볼츠만은 시간의 흐름에는 본질적인 어떤 것도 없으며,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우주의 불가사의한 불가능성이 희미하게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세계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불완전한 방식으로 세상을 기술하는 산물이다.
현재의 끝: '지금'의 소멸
우리는 흔히 우주 전체에 공통된 '지금'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로벨리는 단언한다. "우주의 현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거품 속에서만 유효하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은 화성에서는 15분, 프로시마 b에서는 8년, 안드로메다 은하에서는 수백만 년에 이른다. 이 간격은 단순한 대기가 아니라 지구에서 본 '지연된 현재'이자 '확장된 현재'다.
우리가 안드로메다 은하를 바라볼 때, 우리는 250만 년 전의 빛을 본다. 그 순간은 우리에게는 현재로 경험되지만, 그 별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과거다. 따라서 우주 곳곳에 잘 정의된 '지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환상이자 우리 경험의 부적절한 외삽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구조를 '광원뿔(Light Cone)'로 설명했다.
광원뿔의 구조와 인과율의 한계
우주는 시간이 모든 곳에서 동일하게 흐르는 단일한 강물이 아니다. 대신, 개별적인 '사건(event)'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가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구조, 바로 광원뿔(Light Cone)의 집합이다.
1908년,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이제부터 공간 그 자체와 시간 그 자체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오직 둘의 합일체만이 독립적인 실체로 남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4차원 시공간(spacetime)의 무대를 열었다. 이 무대 위에서 모든 사건은 저마다의 광원뿔을 가진다.
가로축 (시간 t)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미래(+t), 왼쪽으로 갈수록 과거(-t)이다. 세로축 (공간 x)은 공간의 위치를 나타낸다. 위쪽은 한 방향(+x), 아래쪽은 반대 방향(-x)이다. 실제 3차원 공간을 이해하기 쉽게 1차원 직선으로 압축한 것이다.
원점 (0, 0)은 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지점, 즉 '지금, 여기(now, here)'에서 발생한 단 하나의 '사건(event)'을 의미한다. 어둠 속에서 성냥을 탁 켜는 한순간을 상상해보자. 이 '사건'을 원점(0,0)으로 할 때, 빛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의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가며 4차원 시공간에 원뿔 모양의 궤적을 그린다.
빛 경계선 ($x = +ct, x = -ct$)은 원점에서 발생한 사건(섬광)의 빛이 시간(t)이 흐름에 따라 공간(x)으로 퍼져나가는 경로를 나타낸다. 붉은색 선 ($x = +ct$)은 $+x$ 방향으로 빛의 속도(c)로 나아가는 빛의 경로이다. 푸른색 선 ($x = -ct$)은 $-x$ 방향으로 빛의 속도(c)로 나아가는 빛의 경로이다.
이 직선의 기울기는 빛의 속도에 의해 결정되며,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라 이 우주에서 그 어떤 정보나 물질도 이 경계선보다 더 가파른 경로(즉, 빛보다 빠른 경로)를 가질 수 없다. 이 선들은 인과관계의 절대적인 한계를 설정한다.
미래 광원뿔: 다홍색으로 색칠된 영역은 미래 광원뿔로서 원점의 사건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시공간 영역이다. 원점에서 출발한 우주선이나 사람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빛보다는 느리기 때문에, 그 경로는 반드시 이 다홍색 영역 안쪽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곳은 현재 사건의 '결과'들이 펼쳐지는 무대이다.
과거 광원뿔: 푸른색 영역은 과거 원뿔로서 원점의 사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과거의 시공간 영역이다. 과거의 어떤 일이 현재의 이 사건에 영향을 주려면, 그곳에서 출발한 정보(신호)가 빛보다 느린 속도로 달려와 현재의 원점에 도달해야 한다. 이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과거 지점의 집합이 바로 이 푸른색 영역이다. 이곳은 현재 사건의 '원인'들이 존재했던 무대이다.
그 밖의 영역 (Elsewhere): 색이 없는 바깥 영역은 인과적으로 단절된 시공간으로서 두 원뿔의 좌우 바깥 영역은 원점의 사건과 그 어떤 상호작용도 할 수 없는 곳이다. 예를 들어, 현재 원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바깥 영역의 미래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정보를 전달하려면 빛보다 빨리 달려가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바깥 영역의 과거에서 일어난 일은 현재의 사건에 아무런 원인이 될 수 없다. 이곳은 '그 밖의 영역(elsewhere)'이라 불리는, 빛의 속도로도 닿을 수 없는 인과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시공간이다.
앞서 설명한 지구와 화성 사이의 15분, 안드로메다 은하와의 250만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바로 이 '그 밖의 영역'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금의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고, 나 또한 그곳에 닿을 수 없다. 따라서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관측자의 광원뿔 안에서만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우리의 '현재'는 국소적인 거품일 뿐이다.
기울어진 광원뿔과 운명의 왜곡
질량은 시공간을 휘게 만들고, 그 위에 놓인 광원뿔도 함께 기울인다. 특히 블랙홀과 같은 거대 질량 주변에서는 광원뿔이 극단적으로 블랙홀 중심을 향해 쏠린다.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는 순간, 기묘한 일이 발생한다. 미래를 향하는 광원뿔 전체가 블랙홀의 중심인 특이점(singularity)을 향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탈출 불가가 아니다. 탈출할 수 있는 '미래의 방향' 자체가 시공간에서 소멸했음을 의미한다. 중력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운명의 방향마저 왜곡하여, 미래가 곧 '중심'이 되게 만든다.
결론: 시공간의 태피스트리
결국 ‘단 하나의 시간이란 없다’이다. 우주는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시간(뉴턴의 생각)이 흐르는 무대가 아니다. 대신, 무한한 사건들이 저마다의 과거(정보를 받는 원뿔)와 미래(영향을 주는 원뿔)를 펼치며 서로를 원인으로 삼고 결과로 이어주는, 극도로 복잡하고 역동적인 4차원의 구조물인 것이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는 바로 이 수없이 얽힌 광원뿔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는 단 하나의 거대한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사건들의 광원뿔이 서로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4차원 시공간의 태피스트리(tapestry)라고 할 수 있다.
독립성의 상실: 시간의 체화
인류는 오랫동안 시간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겼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시간에게서 그 고고한 '독립성'을 박탈했다. 시간은 더 이상 세상과 분리되어 홀로 흐르는 강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의 논쟁: 관계인가, 실체인가?
고대부터 시간의 본질에 대한 두 가지 거대한 시각이 충돌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간은 '변화의 척도'였다. 사물이 변하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공간 또한 사물의 위치 그 자체일 뿐, 사물이 없는 '빈 공간'은 존재할 수 없었다.
반면, 뉴턴은 정반대의 생각을 했다. 그는 사물의 변화와 무관하게 냉정하고 동일하게 흐르는 '수학적 절대 시간'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공간은 물질이 모두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거대한 '빈 캔버스'와 같았다. 우리는 학교에서 뉴턴의 물리학을 배우며 이 절대적인 시간관에 익숙해져 있다.
아인슈타인의 통합: 시공간은 중력장이다
이 오랜 논쟁을 종결지은 것은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뉴턴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 개념을 해체하고, 이를 물리적 실체인 '장(Field)'으로 통합했다.
뉴턴에게 중력은 두 물체 사이를 당기는 '힘'이었고, 시공간은 그 힘이 작용하는 고정된 무대였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은 이 관점을 뒤집었다. 중력은 힘이 아니다. 중력은 질량과 에너지에 의해 휘어진 시공간 자체가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효과다.
태양이 지구를 당기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질량이 시공간이라는 직물을 휘게 만들고, 지구는 그 휘어진 계곡을 따라 구르고 있을 뿐이다. 즉, 중력장이 곧 시공간이고, 시공간이 곧 중력장이다.
독립성의 상실: 무대에서 배우로
이제 시간(과 공간)은 물질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독립적인 배경이 아니다. 시간은 물질이 있는 곳에서 느려지고(중력 시간 팽창), 공간은 물질에 의해 구부러진다. 존 휠러의 말처럼 "시공간은 물질에게 어떻게 움직일지 말해주고, 물질은 시공간에게 어떻게 휠지를 말해준다".
시계와 자는 절대적인 시간과 길이를 재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들은 그 위치에서 중력장(시공간)이 얼마나 휘어져 있는지를 측정하는 기구일 뿐이다. 중력장은 파도처럼 출렁이며 중력파를 만들기도 하고, 블랙홀처럼 찢어질 듯 휘어지기도 한다. 시간은 이 역동적인 우주의 춤에 참여하는 능동적인 구성 요소가 되었다.
새로운 도전: 양자 중력을 향하여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조차 마지막 퍼즐은 아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을 매끄러운 곡면으로 묘사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불연속적인 입자(양자)로 이루어져 있다.
물리학자들은 중력장(시공간) 또한 양자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즉, 시간과 공간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플랑크 시간, 플랑크 길이)를 가지며, 확률적으로 요동치는 '양자 중력'의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입자가 만드는 중력장은 어떻게 될까? 시공간이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휘어져야 할까? 일반 상대성 이론은 이렇게 '확률적인' 물질이 만드는 중력장을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시간은 독립성을 잃는 것을 넘어, 연속성이라는 개념조차 잃고 알갱이로 부서진다. 이것이 현대 물리학이 도달한 시간의 가장 깊은 민낯이다.
시간의 양자: 연속성의 붕괴
시간의 해체 작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조차 양자역학 앞에서는 더 잘게 부서진다. 루프 양자중력 이론은 시간마저 양자화됨을 시사한다.
첫째, 시간은 입자성을 띤다.
시간은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다. 루프 양자중력 이론은 시간에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스케일이 존재함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를 '플랑크 시간'이라 부르며, 그 값은 약 $10^{-44}$초이다. 이 미세한 수준 아래에서 시간의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알갱이로 떨어지는 것이다.
둘째, 시간은 중첩된다.
양자역학에서 전자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듯이, 시공간 또한 확정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여러 상태가 확률적으로 겹쳐 있을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조차 확률적으로 흔들리며, 인과율의 순서가 뒤섞일 수도 있다.
셋째, 시간은 관계적이다.
전자가 관측(상호작용)되기 전까지는 확률 구름 속에 존재하듯, 시간의 기간 또한 물리적 상호작용이 일어날 때만 구체적인 값을 가진다. 측정하지 않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사물들 사이의 관계망 속에서 순간순간 탄생하는 사건일 뿐이다.
사건의 네트워크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유일함도, 방향성도, 현재도, 독립성도, 연속성도 사라졌다. 로벨리가 안내한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텅 빈 손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비어있음은 허무가 아니다. 시간이라는 견고한 틀이 사라진 자리에,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생성되는 역동적인 '사건(event)'들의 세계가 드러난다. 세상은 사물(thing)이 아니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붕괴된 것은 세상이 사물로 이루어졌다는 관점이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돌은 사물이고,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세상의 사물은 원자일까, 입자일까? 세상은 그러한 물리적인 사물로, 존재자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세상이 사건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하면, 작동한다. 복잡한 사건이든 더 간단한 사건이든 단순한 사건들의 조합으로 분해될 수 있다. 전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다. 폭풍우도 사물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 산 위의 구름도 사물이 아니다. 공기 중의 습기가 응결된 것을 바람이 산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파도도 사물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고, 이 물은 언제나 다른 모양을 만든다. 가족도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 느낌의 총체다. 인간도 구름처럼 음식, 정보, 빛, 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 화학적 프로세스의 네트워크 속에, 자신과 비슷한 타인들과 교환한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수많은 매듭들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프톨레마이오스에서 갈릴레오, 뉴턴, 슈뢰딩거에 이르기까지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원자의 ‘형태’는 결국 전자들이 원자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에서 나온 답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는 세상을 어떠한지가 아니라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한다. ‘사물’이 어떠한지가 아니라, ‘사건’이 어떻게 벌어지는가를 설명한다. 우리는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하고 ‘살아가는지’를 연구하면서 생물학을 알게 되었다.
‘사물’ 자체도 잠깐 동안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다. 이후에는 먼지로 돌아간다. 사실 모든 것은 언젠가 먼지가 된다.
세상은 양자 사건들의 방대하고 무질서한 그물이다. 깔끔한 싱가포르보다는 어지럽고 지저분한 나폴리와 비슷하다.
‘시간’이 그저 사건을 뜻하는 것뿐이라면, 모든 사물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 있는 것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시간의 원천은 무엇일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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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로벨리 물리학을 소개하는 동심헌(童心軒)의 기획 시리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