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인포그래픽은 NASA의 WMAP(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미션 결과를 바탕으로, 현대 표준 우주론인 $\Lambda$CDM 모형이 설명하는 우주의 역사를 시각화한 것이다.
태초의 순간 (좌측): 우주는 미시적인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s)에서 시작하였다. 시간의 시작점, $t=0$에 가까운 순간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미시 세계의 에너지가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이 미세한 에너지의 불균형이 없었다면 우주는 완벽하게 균일했을 것이고, 별이나 은하 같은 구조가 생겨날 수 없었다. 즉, 이 극한의 밀도로 형성된 시공간의 '요동'이 만물의 씨앗이 되었다. 우주 탄생 직후 $10^{-35}$초 즈음, 빛보다 빠른 속도로 공간이 늘어나는 급팽창(Inflation)을 겪으며 시공간의 틀을 마련했다.
빛의 탄생: 빅뱅 후 38만 년이 지난 시점, 우주 배경 복사(Afterglow Light Pattern)가 방출되며 최초의 물질 구조가 형성될 수 있는 '상전이'의 씨앗을 뿌렸다.
구조의 창발 (중앙): 칠흑 같은 암흑시대(Dark Ages)를 뚫고 약 4억 년 무렵 최초의 별(1st Stars)이 점화되었으며, 이후 중력이 물질을 끌어모아 은하와 행성이라는 복잡계 질서를 구축했다.
가속 팽창 (우측): 시간축의 끝(현재)에 이르러 우주는 암흑 에너지(Dark Energy)에 의해 팽창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나팔 모양으로 벌어지는 구조를 띠고 있다.
Big Bang Expansion 13.7 billion years: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의 총 시간이다.
(이미지 출처: NASA / WMAP Science Team)
시공간의 기원
앞장 제18편(⑱ 공간의 원자: 스핀 네트워크와 빅 바운스)에서 보았듯이 이제 공간은 양자중력과 함께 물리학에서 사라진다. 사물들(양자들)은 공간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의 부근에 있는 것이며 공간은 사물들이 근접하는 관계의 조직이다.
중력을 양자화할 때, 미리 좌표나 격자를 그려놓고 그 위에서 양자 상태를 정의할 수 없다. 양자 상태는 외부의 어떤 기준점도 없이, 오직 '관계'만으로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
점(node)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어떤 점이 다른 어떤 점과 연결되어 있는가(link)'라는 연결 정보, 즉 관계망만이 물리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위치나 형태는 의미가 없고, 오직 '연결 구조'와 그 연결선에 부여된 '스핀 값'만이 유일하게 물리적인 정보로 남는다. 이로 인해 양자 상태는 자연스럽게 추상적인 네트워크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관계망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도구가 바로 스핀 네트워크(그래프)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망의 출발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무(無)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시공간이 없는 근원적 상태로부터의 '상전이(相轉移)' 또는 '창발(Emergence)'로 설명된다. 창발적 현상이란 개개 부분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행동이 전체 복잡계에서는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첫 번째 원인'이나 '최초의 한 점'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창발은 단순히 '없던 것이 나타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개별 구성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하위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물리적 질서가 상위 단계에서 압도적으로 출현하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창발은 개별적인 '스핀 네트워크'의 마디(node)들이 서로 얽히며 복잡성을 더해갈 때 발생한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이는 상전이와 유사하다.
예를 들어 물 분자 하나하나에는 '흐름'이나 '파도'라는 성질이 없다. 하지만 수조 개의 분자가 모여 특정 온도와 밀도에 도달하면, 개별 분자 수준에서는 정의할 수 없던 '액체'라는 새로운 거시적 상태가 출현한다. 마찬가지로 스핀 네트워크의 연결이 충분히 밀접해지면, 우리는 더 이상 개별 연결선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만들어낸 부드러운 연속체인 '공간'을 인지하게 된다. 즉, 공간은 근원적 실체가 아니라 네트워크가 보여주는 거시적 통계 현상이 된다.
공간은 사물들이 근접하는 관계의 조직이다. 루프 양자중력 이론에 따르면, 면적과 부피는 연속적인 값이 아니라 양자화되어 있다. 이 불연속적인 양자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Link)하며 거대한 망을 형성할 때, 그 관계의 밀도가 우리가 느끼는 '거리'와 '부피'라는 감각을 만들어낸다.
공간의 탄생은 어느 한 점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창발은 전체 시스템의 연결 패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개별 양자 상태에는 '공간'이라는 정보가 들어있지 않지만, 그들이 맺는 전체적인 관계의 형상이 공간을 규정한다. 이는 공간이 '배경'으로서 먼저 존재하고 그 안에 사물이 놓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관계가 성숙해짐에 따라 공간이라는 형질이 사후적으로 도출됨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창발이란 공간이 없는 양자들의 관계망이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우리가 인지하는 3차원의 연속적 배경을 만들어내는 물리적 질서의 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고전 역학적 관점에서 우주의 시작점은 부피가 $0$이고 밀도가 무한대인 '특이점(Singularity)'이다. 그러나 루프 양자중력 이론의 관점에서 공간은 창발된 것이며, 그 최소 단위인 '공간 양자'가 존재한다. 공간의 부피 연산자는 불연속적인 고윳값을 가진다. 즉, 공간은 무한히 압축될 수 없으며, 특정한 최소 부피($V_{min}$) 이하로 줄어들 때 강력한 양자적 반발력이 발생한다. 거대한 별이 붕괴하거나 우주가 수축할 때, 이 임계 밀도에 도달하면 수축하던 에너지는 다시 팽창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이것이 바로 '빅뱅'으로 일어나는 창발의 순간, 즉 빅 바운스이다.
따라서 우주의 탄생을 '무(無)에서의 폭발'이 아닌 창발적 상전이로 이해할 때 스핀 네트워크가 존재하기 전, 즉 공간과 시간이 의미를 갖기 전의 상태를 상상해야 한다. 이 상태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가 아니다. 창발의 메커니즘은 2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양자 거품(Quantum Foam) / 순수 잠재성이다. 공간이 창발되기 전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공간적 위치나 시간적 순서가 없는, 순수한 양자 정보와 잠재적 관계들의 '수프(soup)' 또는 '거품(foam)'과 같다. 이곳에는 아직 안정적인 노드나 링크가 없다. 오직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 즉 '관계의 잠재성'만이 양자역학적 불확정성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비유를 들자면, 아직 얼지 않은 수증기 분자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각 분자는 다른 분자와 연결될 '잠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온도가 충분히 높을 때는 어떤 안정적인 구조(얼음 결정)도 형성하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떠다닌다. 이 수증기 구름이 바로 '전(前)기하학적(pre-geometric)' 상태와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 무질서한 잠재성의 바다에서 어떻게 안정적인 스핀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두 번째, 자발적 대칭 깨짐이다. 물리학에서 어떤 시스템이 특정 조건(예: 온도 하강)에 도달했을 때, 무질서하고 대칭적인 상태에서 질서 있고 비대칭적인 상태로 저절로 바뀌는 현상이 있다. 그것이 우주의 상전이이다.
이와 유사하게, 이 '전(前)기하학적' 상태에서 어떤 임계 조건이 만족되면서 (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물리 법칙일 수 있다) 잠재적 관계들이 서로 얽히기 시작하며 안정적인 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수증기가 특정 온도 이하로 냉각되면서 첫 번째 작은 얼음 결정(핵)이 생겨나고, 그 핵을 중심으로 주변의 물 분자들이 급속도로 달라붙어 눈송이라는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이 '결정화'의 순간이 바로 우리가 '빅뱅' 또는 '빅 바운스'라고 부르는 사건일 수 있다. 이는 무에서 시작된 폭발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던 상태에서 시공간이라는 '관계의 질서'가 생겨나기 시작한 순간인 것이다.
따라서 관계망의 출발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누가 첫 번째 관계를 맺었는가?" 라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과 인과율 자체가 관계망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대신, "어떻게 관계 맺음이라는 현상 자체가 가능해졌는가?" 라는 질문이 더 본질에 가깝다.
답은, 시공간이 없는 근원적 양자 상태가 어떤 임계 조건을 거치면서, 마치 물이 얼음으로 변하듯, '관계'라는 질서를 가진 스핀 네트워크 구조로 자발적으로 상전이했다는 것이다. 결국 관계망의 출발은 '최초의 한 점'이 아니라, 무질서한 잠재성의 바다에서 질서 있는 구조가 태동한 우주적 규모의 '창발' 현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맺음으로부터 중력장의 양자는 이제 공간 속에 있지 않고, 공간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중력의 양자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 시간이고, 시간은 공간과 같이 양자중력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자거품: 인과율의 모호성
양자들을 무시하는 한 시간은 꽤 관습적인 방식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양자역학을 고려하는 순간 우리는 시간 역시도 모든 실재에 공통적인 확률적 양자중첩, 입자성, 관계성의 양상1)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시간’이라고 불러온 것과는 아주 다른 ‘시간’이 되는 것이다.
시간은 세계의 모든 곳에서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더 빨리 흐르고 다른 곳에서는 더 천천히 흐른다. 지구의 중심에 가까울수록 중력이 더 강해져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른다.
우리는 시간을 우주의 생애를 가리키는 커다란 우주적 시계가 있기라도 하듯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간은 국지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주의 모든 대상은 자신만의 시간 흐름을 갖고 있으며, 그 흐름은 국지적인 중력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중력장의 양자적 본성을 고려할 때는 국지적 시간조차도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양자 사건들은 아주 작은 규모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를 매길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모든 사건을 순서대로 꿰는 하나의 거대한 강물과 같다. 이 강물 덕분에 우리는 'A가 일어난 다음에 B가 일어났다'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중력 이론에 따르면, 플랑크 시간(약 $10^{-43}\text{s}$)과 플랑크 길이는 $10^{-35}\text{m}$라는 궁극의 미시 세계로 내려가면, 이러한 부드럽고 연속적인 '시간의 강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이 불연속적인 '알갱이(스핀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시간' 역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불연속적인 '순간(tick)'들의 나열로 볼 수 있다. 즉, 시간은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이다. 아날로그 (연속적)는 1과 2 사이에는 1.1, 1.01, 1.001처럼 무한히 많은 중간 단계가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부드러운 시간이다. 하지만 디지털 (이산적)은 1이라는 상태에서 다음 상태인 2로 중간 단계 없이 곧바로 '도약(jump)'한다. 1과 2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플랑크 규모의 근본적인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배경 자체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순서'라는 개념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의미를 잃게 된다.
첫째, 원인과 결과의 불확실성 (양자적 인과율의 모호성)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극도로 짧은 시간 간격($\Delta t$) 동안에는 에너지($\Delta E$)의 불확실성이 엄청나게 커진다. 이로 인해 인과관계의 중첩이 발생한다.
즉, A가 원인이 되어 B라는 결과가 발생하는 사건을 생각해 보자. 거시 세계에서는 반드시 A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플랑크 규모에서는 에너지의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A가 B를 일으키는 상태'와 'B가 A를 일으키는 상태', 심지어 'A와 B가 동시에 발생하는 상태'가 모두 중첩되어 존재할 수 있다.
이를 끓는 물의 거품에 비유하면, 끓는 물 표면을 순간적으로 보면, 수많은 거품이 동시에 생겨났다 사라진다. 이때 특정 거품 A가 옆에 있는 거품 B를 '만들었다'고 인과관계를 부여할 수 없다. 그저 에너지(열)가 요동치면서 나타나는 혼돈스러운 동시적 현상일 뿐이다. 플랑크 규모의 사건들도 이와 유사하다.
둘째, 시간과 공간의 뒤섞임 때문이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강력한 중력은 시간을 왜곡시킨다. 플랑크 규모에서는 중력이 극도로 강해지며 양자요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시공간이 격렬하게 뒤틀리고 요동치는 '양자거품' 상태가 된다. 이 거품 속에서는 시간 차원과 공간 차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어떤 방향이 '앞(시간)'이고 어떤 방향이 '뒤(공간)'인지 정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발생한다. 앞과 뒤의 구분이 모호해지니, 두 사건의 선후 관계를 매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요약하면, 우리가 시간의 '순서'를 정하는 기준인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이라는 배경 자체가 플랑크 규모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시간이 더는 쪼갤 수 없는 불연속적인 '순간'들의 나열이며, 양자 불확정성으로 인해 'A 다음 B'라는 인과율마저 확률적으로 뒤섞여 버린다. 따라서 그곳의 사건들은 하나의 시간선 위에 순서대로 꽂을 수 있는 구슬이 아니라, 시공간의 구분조차 모호한 양자거품 속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명멸하는 확률의 거품과 같다.
이는 빅뱅의 최초 순간이나 블랙홀의 중심부에서는 '~이전에' 또는 '~이후에'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며, 우리가 아는 모든 인과율이 근본적으로 재정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사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주 복잡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시간을 측정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다른 물리적 변수를 서로 비교하는 과정일 뿐이다. 갈릴레오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 즉 가속도를 구하려 했지만, 정밀한 시계가 없던 시대라 별도의 기준이 필요했다. 그가 선택한 척도는 샹들리에의 흔들림과 자신의 맥박이었다. 샹들리에가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뛰는 맥박의 수가 일정했고, 반대로 맥박의 규칙성을 샹들리에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측정하는 것이 시간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언제나 물리적 변수들, 샹들리에의 흔들림이나 맥박이 다른 많은 것들을 측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변수를 다른 변수와 비교한다. 즉, 우리는 함수 A(B), B(C), C(A)…를 측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시간에 따른 변화의 방정식으로 기술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실제로 관찰하는 변수들 A, B, C,…등을 그저 나열하고, 이러한 변수들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뿐이다. 즉, 우리가 관찰하는 관계들 A(B), B(C), C(A)…등에 대한 방정식을 쓰는 것이지,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함수들 A(t), B(t), C(t)…등에 대한 방정식을 쓰는 것이 아니다.
맥박과 샹들리에의 예를 보면, 우리는 시간에 따른 맥박과 샹들리에의 움직임이 아니라, 두 변수가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말해주는 방정식만을 갖는 것이다. 즉, 맥박이 한 번 뛰는 시간 $t$ 와 샹들리에가 한 번 흔들리는 시간 $t$ 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t$ 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샹들리에가 한 번 흔들릴 때 맥박이 몇 번이나 뛰는지를 직접 말해주는 방정식 말이다.
그러니까 ‘시간 없는 물리학’은 시간을 언급하지 않고 오직 맥박과 샹들리에에 대해서만 말하는 물리학이다.
우리는 세계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물들은 오직 서로에 관해서만 변화한다.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이라는 인상은 오직 거시적 규모에서만 유효한 근사치일 뿐이다.
세계를 ‘담고’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없다. 사건들이 ‘그것’에 따라 발생하는 시간도 더 이상 없다. 공간의 양자들과 물질들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기본적인 과정이 존재할 뿐이다. 투명하고 잔잔한 산정 호수가 무수한 작은 물 분자들의 빠른 춤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당구대의 가장자리
로벨리는 양자중력을 이해하기 위해, ‘세계가 담겨 있는 공간’이나 ‘세계가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고전적 배경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공간과 시간이 무대가 아니라, 과정들로부터 재구성되는 물리적 관계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당구공이 부딪히는 과정을 예로 든다.
예를 들어, 가상의 상자 속에서 두 공이 충돌하고 흩어지는 과정은 4m 정도의 당구대라는 유한한 ‘공간’, 3초 정도의 유한한 ‘시간’ 안에서 완결된다. 이 과정 전체를 기술하려면, 두 공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통찰처럼 시간과 공간이 중력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은 시공 속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시공의 흐름을 구성한다.
‘시공 상자’란 이러한 과정이 포함된 하나의 유한한 영역을 의미한다. 즉, 시공의 가장자리(boundary)는 그 상자의 경계다.
양자중력은 이 상자 내부 과정만이 아니라 상자 전체(가장자리 포함)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전 과정을 규정하는지를 고려하는 이론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직관에 의하면 양자역학은 과정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초기 상태와 최종 상태를 연결하는 확률을 말해준다. 루프 양자중력에서 이 상태들은 시공 상자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의해 주어진다.
이 확률을 계산하기 위해 루프 양자중력의 방정식들은 파인만의 '경로 적분'을 사용한다. 즉, 입자가 이동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경로를 합산하듯, 상자의 가장자리를 공유하는 모든 가능한 '시공들'을 합하여 계산한다.
결국 공이 들어가는 최초의 가장자리와 공이 나오는 최종 가장자리 사이에는 확정된 하나의 시공간이나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한 모든 시공들과 가능한 모든 경로들이 '함께 있는' 양자 '구름'이 있다.
로벨리가 말하는 그 확률은 '전이 진폭의 제곱'이다. 이 확률은 "우리가 관측한 초기 상태(과정의 시작)가 특정 최종 상태(과정의 끝)로 연결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즉, "공이 어디로 들어가서(IN) 어떻게 부딪치면 어디로 나오게 되는지(OUT)의 확률"이다.
이를 수식으로 개념화하면 다음과 같다.
$P(A \rightarrow B) = \left| \sum_{\text{모든 가능한 시공들}} (\text{각 시공의 가중치}) \right|^2$
$\sum$ (합): 시작(A)과 끝(B) 사이를 채울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시공간의 역사(스핀 거품들)를 전부 더한다. 이 합의 결과값이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된다.
우리가 계산하는 확률은 오직 "이 상자의 껍질(가장자리)이 특정 모양(초기 상태와 최종 상태)을 가질 확률"이다. 한 줄로 정리하자면, 그 확률은 "당구공들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시공간의 역사(여정)들을 합산했을 때, 결과적으로 공이 특정 위치에서 발견될 수치적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그 합은 얼마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4m라는 거시적인 크기(일상적인 크기)에서 그 합을 계산하면 우리가 흔히 아는 '고전 역학(뉴턴 법칙)'의 결과가 나온다.
로벨리가 예시로 든 '4제곱미터, 3초'라는 조건은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너무나 거대하고 긴 시간이다. 플랑크 길이는 $10^{-35},\text{m}$ 인데 비해 당구대는 $4m$이다. 이 엄청난 크기 차이 때문에, 파인만의 경로 적분 방식에 따라 모든 말도 안 되는 경로들을 다 겪더라도, 합을 계산(적분)해보면 비상식적인 경로들은 서로 상쇄 간섭을 일으켜 사라진다.
오직 '가장 자연스러운 경로(고전적 경로)'만이 서로 보강 간섭을 일으켜서 합이 최대치가 된다. 즉, 당구공이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대로 굴러갈 확률은 거의 1(100%)이고, 이상하게 움직일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즉, 그 합은 뉴턴의 운동 법칙과 똑같은 결과를 내놓는다. 답은 "당구공은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대로 굴러간다"이다.
로벨리의 당구대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거대한 당구대조차 본질적으로는 무수히 많은 양자 거품의 합이지만, 그 거시적 합의 결과가 우리가 경험하는 매끄러운 현실로 나타난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정교한 사고실험이다.
스핀거품
스핀 네트워크의 구성(정보)
루프 양자중력에서의 스핀 네트워크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는 전자·광자 같은 물질 입자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시공간 자체를 이루는 구조적 정보가 들어 있다.
스핀 네트워크는 노드(node), 링크(link), 그리고 인터트윈어(intertwiner)로 구성된다.
노드(node)는 스핀 네트워크의 점(교차점)으로서, 부피의 양자와 대응한다. 즉, 노드 하나가 공간의 아주 작은 “부피 알갱이”를 표현한다.
링크(link)는 노드를 연결하는 선으로 면적의 양자와 대응한다. 링크에는 SU(2) 군의 스핀 값 $j = 0, \tfrac12, 1, \tfrac32, \dots$ 이라는 라벨이 붙는다. 이 스핀 값이 면적 연산자의 불연속 고유값을 결정한다.
인터트윈어(intertwiner)는 노드에서 만나는 여러 링크들의 스핀을 조화롭게 연결해 주는 수학적 객체이다. 이는 해당 노드가 가지는 “부피”의 크기와 형태를 결정하는 정보이다.
스핀 네트워크가 담는 것은 정보다. 형태 정보로서 면적과 부피의 불연속 값, 연결성 정보로서 어떤 부피 알갱이가 어떤 면을 통해 연결되는가이다.
스핀 네트워크의 양자적 상태란 스핀 값 $j$와, 인터트윈어의 배치가 곧 “공간의 상태”를 뜻한다. 즉, 스핀 네트워크는 “시공간의 지도를 좌표 대신 양자적 연결 구조로 그려낸 것”이다.
물질 입자는 스핀 네트워크 안에 직접 들어 있지 않다. 물질과 에너지는 스핀 네트워크 위에 추가로 얹혀 있는 장(fields)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스핀 네트워크 자체는 “순수한 공간의 원자적 구조”만 담고 있다.
“스핀 네트워크가 면적과 부피를 가진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무언가 실제 물질적 ‘입자’가 쌓여 있어서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식으로 들린다. 그러나 루프 양자중력에서 말하는 것은 “물질적 구성요소”가 아니라 “관계적 구조”이다.
스핀 네트워크의 노드(node)와 링크(link)는 실재하는 알갱이가 아니다. 그것은 수학적 상태, 즉 시공간 기하학을 기술하는 양자적 정보이다. 따라서 “돌멩이처럼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수한 관계망으로 존재한다.
노드는 부피 연산자의 고유값에 해당하고 “이만큼의 부피가 있다”는 의미, 링크는 면적 연산자의 고유값에 해당하고 “이만큼의 면적이 있다”는 정보다. 이 값들은 측정 가능한 양이지, 알갱이의 내부 물질을 뜻하지 않는다. 즉, 스핀 네트워크는 “부피와 면적이라는 수학적 관측값이 불연속적이다”라는 정보를 담고 있을 뿐, 그 자체가 물질로 채워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화면은 수많은 픽셀로 되어 있고, 픽셀 하나는 특정 크기와 색을 가진다. 하지만 그 픽셀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다”기보다는, 정보 단위일 뿐이다. 스핀 네트워크도 플랑크 규모의 픽셀처럼 정보 단위를 가진다. 따라서 양자적 구조란, 시공간이 정보적·관계적 구조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스핀 거품
그렇다면 양자공간이 스핀 네트워크의 구조를 갖는다면, 양자 시공은 어떤 구조를 가질까?
그것은 스핀 네트워크의 '역사'일 것이다. 즉, 스핀 네트워크의 각 노드(점)는 움직이며 하나의 선을 그리고, 네트워크의 각 링크(선)는 움직이면서 하나의 표면을 그리는 여정이다.
선분이 움직이면 직사각형(면)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의 입자가 둘 이상의 입자들로 쪼개질 수 있듯이, 하나의 노드가 둘 이상의 노드들로 나뉠 수 있다. 혹은 둘 이상의 노드들이 한 노드로 결합할 수도 있다.
이처럼 변화하는 네트워크의 궤적을 ‘스핀 거품(Spin Foam)’이라 부른다. 비눗방울 거품들이 만나 선을 이루고 꼭짓점에서 합쳐지는 구조와 정확히 닮았기 때문이다. 네트워크의 선들이 스핀을 가지므로, 이 거품의 면들도 스핀을 가진다.
공간은 스핀 네트워크이고, 시공간은 스핀 거품이다. 시공간은 고정된 무대가 아니라, 스핀 네트워크들이 상호 변환되는 과정들의 합, 즉 스핀 거품들의 합으로 생성된다.
스핀 거품은 스핀 네트워크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진화하고 변화하는지를 나타낸다. 스핀 네트워크가 2차원 그래프라면, 스핀 거품은 시간의 흐름을 포함한 3차원 이상의 구조로, 스핀 네트워크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양자 역사'에 해당한다.
공간과 시간을 생성하는 양자들의 이 미시적 무리는 우리를 둘러싼 거시적 현실의 고요한 외관의 기저에 놓여 있다. 세제곱미터의 공간 하나하나가, 흘러가는 일초 일초가 극도로 작은 양자들이 춤추는 거품의 결과인 것이다.
공변양자장: 시공간이 사라진 관계망의 세계
이로써 이제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시공'이 되었다. 로벨리는 이를 “그 자체로 존립하면서 시공 자체를 생성할 수 있는 장”, 즉 '공변 양자장'이라고 불렀다. 세계, 입자, 빛, 에너지, 공간과 시간... 이 모든 것은 '공변 양자장'이라는 단 한 가지 유형의 존재자가 펼치는 춤이다.
로벨리는 공변양자장은 최초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낙시만드로스가 가정했던 만물의 원질인 '아페이론', 무한정자를 오늘날 가장 잘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일반상대성이론의 연속적인 굽은 공간과 양자역학의 평평하고 균일한 공간 속에 있는 불연속적인 양자들 사이의 분리는 이제 완전히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공변(covariant)은 시간적 측면과 공간적 측면을 비교적 균일하게 다루는 루프 양자중력이론의 접근법이다.
양자역학의 공변적 접근 방법에서는 물리적 결과를 계산하기 위해 '전이확률', 즉 어떤 초기 상태가 관측되었을 때, 특정 최종 상태가 관측될 확률을 구한다. 전이 확률은 가능한 모든 '경로'의 합으로 계산될 수 있다.(파인만)
양자중력에서 경로는 중력장의 다양한 배치, 즉 시공간의 배치라고 볼 수 있다. 스핀 네트워크의 변화 '경로' 자체를 시공간이라는 단어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과 양자중력은 확률적 예측만을 이야기한다. A라는 지점에서 하나의 입자를 발견할 경우, B라는 지점에서 그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다. 다만 양자중력에서는 입자 대신 '스핀 네트워크'의 관측 될 확률을 말한다. 그 각각의 경로는 무수히 많은 각기 다른 시공간들이 동시에 공존한다.
이러한 각각의 경로는 스핀 거품이라고 한다. 스핀 거품은 스핀 네트워크의 경로들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스핀 네트워크의 경로들의 합인 시공간은 스핀 거품 그 자체인 것이다.
루프 양자중력이론은 이러한 스핀 거품으로 표현하는 접근법을 가장 활발히 연구하는 분야 중 하나이다.
각각의 스핀 거품은 A라는 상태에서 B라는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경로를 의미하여, 여기에는 A부터 B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서로 다른 거품들이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유효한 확률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경로를 고려하고 그 합을 구해야 한다.
로벨리에 따르면, 최근 여러 연구팀이 이 스핀 거품의 '진폭', 다시 말해 총 전이확률에 미치는 스핀 거품의 영향을 구하기 위한 간단한 공식을 발견했고 이 진폭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간단한 공식'2)의 정체는 꼭짓점 진폭 (Vertex Amplitude)을 말한다. 스핀 거품은 거품들이 서로 만나고 갈라지는 '교차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교차점을 '꼭짓점(Vertex)'이라고 부른다. 파인만의 경로 적분을 계산하려면, 각각의 경로가 얼마나 '가중치'를 갖는지를 알아야 한다. 스핀 거품에서 그 가중치는 "하나의 꼭짓점에서 사건이 발생할 확률(진폭)은 얼마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연구팀이 발견한 공식은 바로 이 단일 꼭짓점에서의 전이 진폭($W_v$)을 구하는 수식이다.
이 공식이 기술하는 '꼭짓점'은 기하학적으로 4차원 사면체(4-simplex)에 해당한다.
우리가 벽돌(3차원)을 쌓아 집을 짓듯이, 우주의 시간과 공간은 이 4차원 사면체들이 무수히 쌓여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연구팀이 찾은 공식은 이 시공간의 벽돌 하나가 가질 수 있는 양자적 확률 값을 규정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양자 공식이 어떻게 거시 세계의 중력(아인슈타인 이론)이 되는가?"이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점근적 해석(Asymptotic analysis)'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사용했다. 즉, 스핀 거품의 크기(양자수)를 아주 크게 키웠을 때(거시 세계로 확대했을 때), 이 공식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계산한 것이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즉, 양자 세계를 기술하는 스핀 거품 공식을 거시적으로 확대해 보니, 놀랍게도 아인슈타인이 1915년에 만든 일반상대성 이론의 수식이 저절로 튀어나온 것이다.
이 발견이 갖는 의미는 실로 막대하다. 첫째, 양자역학(스핀 거품)과 일반상대성 이론(중력)이 서로 다른 언어가 아니라, 같은 현상을 다른 규모에서 바라본 것임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둘째,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공간은 휘어진다"는 개념이, 미시 세계에서는 "스핀 거품들의 확률적 합"으로 구현됨을 보였다.
로벨리가 말한 그 공식은 "미시적인 시공간 알갱이 하나의 확률을 구하는 식"이었으며, 이 식을 통해 "양자 거품들이 모이면 우리가 아는 아인슈타인의 매끄러운 시공간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이는 루프 양자중력 이론이 단순한 가설을 넘어, 실제 중력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후보임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무한대($\infty$)'의 문제다.
물리학 이론은 현실을 예측하기 위해 존재한다. "전자가 A에서 B로 이동할 확률은 얼마인가?"라고 물었을 때, 이론은 "95%입니다" 혹은 "0.0001%입니다"와 같은 유한한 숫자를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방정식을 풀었는데 답이 "무한대($\infty$)"가 나와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무한대이다." 혹은 "이 입자의 에너지는 무한대이다."
이것이 바로 발산(Divergence)이다. 답이 무한대로 나온다는 것은 그 이론이 해당 상황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고장 나버렸음을 의미한다. 양자중력에서 발산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발생한다.
① 자외선 발산 (Ultraviolet Divergence): "너무 작아서"
고전적인 시공간은 연속적이다. 즉, 두 입자 사이의 거리가 '0'이 될 때까지 무한히 가까워질 수 있다. 거리($r$)가 0이 되면, 힘($F \propto 1/r^2$)은 무한대로 치솟는다.(0으로 나누기 오류) 현미경 배율을 무한히 높였더니, 에너지가 폭발해서 화면이 하얗게 타버리는 것과 같다.
루프 양자중력은 이를 해결했다. 공간은 불연속적이다(최소 부피가 있다). 거리가 0이 될 수 없고, 플랑크 길이는 $10^{-35}\text{m}$ 보다 작아질 수 없으므로 이 무한대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② 적외선 발산 (Infrared Divergence): "너무 커서"
이것이 바로 무신 한(Muxin Han), 페어바이언(Fairbairn) 등의 연구팀이 해결한 핵심 문제이다. 경로 적분(역사들의 합)을 할 때, 시공간이 평평하고 끝없이 뻗어 있다고 가정하면, 고려해야 할 경로(스핀 거품)의 개수가 무한히 많아진다. 이 무한한 경로들을 다 더하면 합계가 무한대가 되어버린다. 바닥에 떨어진 쌀알을 주워야 하는데, 바닥의 끝이 무한한 평야라서 평생 주워도 합계를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난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무신 한(Muxin Han), 윈스턴 페어바이언(Winston Fairbairn), 카트린 모이스부르거(Catherine Meusburger)라는 세 명의 과학자다. 이들은 진폭들이 유한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3)하는 데 성공하며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턱을 넘었다.
이들은 우주상수(암흑에너지)가 존재하는 현실적인 우주를 다루기 위해, 마치 특수상대성이론의 '로렌츠 변환식'처럼 시공간의 규칙을 재조정하는 '양자 변환식($q$-deformation)'을 도입하여 자칫 무한으로 치달을 수 있는 스핀 거품의 합을 유한한 값으로 붙잡아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치 끓어오르는 거품이 터져버리지 않고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하듯, 스핀 거품들이 그리는 시공간의 역사는 수학적으로 폭주하지 않고 안정적인 확률값을 내놓는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루프 양자중력은 두 단계에 걸쳐 이 벽을 허물었다. 첫째, '공간의 양자화'를 통해 미시 세계의 무한대(자외선 발산)를 제거했다. 둘째, '양자 변환식'을 통해 거시 세계의 합계가 무한대로 커지는 문제(적외선 발산)까지 해결했다.
이로써 우주는 수학적으로도 모순 없는 '유한하고 계산 가능한 실재'임이 증명된 것이다. 로벨리가 연구하는 루프 양자중력이 제시하는 실재의 모습은 바로 "진폭들이 유한하다"는 물리적 세계의 건전한 구조이다. 무한히 작은 특이점도, 계산 불가능한 무한대의 확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계산 가능한 유한한 관계망만이 실재할 뿐이다.
진폭은 유한하고, 공간은 조각나 있으며, 무한히 작은 특이점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모든 변화를 주관하는 '시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놀랍게도 로벨리는 이 근본적인 방정식들 속에 시간 변수 $t$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고 말한다.(끝)
이전 글 👉 ⑱ 공간의 원자: 스핀 네트워크와 빅 바운스
다음 글 👉 ⑳ 시간 파헤치기―로벨리가 해체한 시간의 층위
"이 연재는 로벨리 물리학을 소개하는 동심헌(童心軒)의 기획 시리즈입니다."
🔖 주(註)
1)이에 대해서는 다음장⑳ 시간 파헤치기―로벨리가 해체한 시간의 층위에서 로벨리의 저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옮김, 쌤앤파커스, 2019, 88~99쪽)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
2) 로벨리와 동료들이 개발한 EPRL 모델에 따르면, 스핀 거품의 점근적 해석(Asymptotic analysis)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https://arxiv.org/pdf/0902.1170 ↩
3) 이 내용은 윈스턴 페어바이언(Winston J. Fairbairn)과 카트린 모이스부르거(Catherine Meusburger), 그리고 무신 한(Muxin Han)이 2010년경 발표한 양자 변형 스핀 거품 모델(q-deformed spin foam model) 연구 논문들에 근거하고 있다. https://arxiv.org/pdf/1012.4784 https://arxiv.org/pdf/1012.4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