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https://science.nasa.gov/what-is-the-spooky-science-of-quantum-entanglement/> "What Is the Spooky Science of Quantum Entanglement?")
실재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로벨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실재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의 기본 관점은 아래와 같이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1)
우리가 인식하는 물리적 실재는 독립적인 속성을 지닌 고고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관계들의 촘촘한 그물망으로 이해된다. 이 능동적이고 주어 중심적인 해석은 고전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며, 양자역학이 밝혀낸 자연의 가장 깊은 진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1. 실재는 상호작용하는 사건의 네트워크이다
물리학은 본래 입자들이 힘을 주고받는 광활한 공간을 기술하였으나,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전자기장(Fields)이라는 공간에 퍼진 실체를 추가하여 먼 거리에서의 힘 작용을 설명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조차도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인 '장'에 의해 전달된다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배경 위에 세워진 양자론은 대상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고 작용하는가를 기술한다. 이 관점에서 대상은 다른 대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 자체로 존재하며, 물리적 세계는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이다. 차일링거의 실험에서 관찰자(차일링거) 역시 관찰 대상(광자, 고양이, 별)과 마찬가지로 이 네트워크 속의 실제 매듭을 형성한다. 즉, 물리적 실재는 개별 대상 내부가 아니라 대상과 대상 사이에 놓여 있는 관계에 위치한다.
2. 대상의 속성은 관계 속에서만 실재한다
관계론적 해석의 가장 근본적인 통찰은 사물의 속성(Properties)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속성은 오직 다른 사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드러나며 그 관계 속에서만 실재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가 어떤 것과도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 그 궤도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직관으로 자신의 행렬역학을 시작하였다. 이 과학적 근거는 상호작용이 없는 대상에는 속성 자체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대상의 속성이란 그 대상이 다른 대상에 작용하는 방식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관계적 성질이 이미 우리 일상에서도 익숙한 예다.
이 직관은 일상적 경험에서도 확인된다. 속도는 절대적 양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 대한 상대적인 변화율이다. 기차 위에서의 속도, 비행기 속도, 지구·태양·은하를 기준으로 한 속도는 모두 다르다. 절대 속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빛의 속도는 관계와 무관하게 일정하다는 특수상대론의 객관적 근거가 존재하지만, 그 역시 "속도가 절대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빛이 모든 관성계와 동일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결국 속성은 대상 내부의 고정된 특징이 아니라 관계의 양식이다.
3. 실재는 관찰자에게 상대적인 국소적 사실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은 실재가 관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점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상자 안의 관찰자(고양이/당신)는 수면제의 방출을 직접 경험하기 때문에, 잠든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 중 하나만이 명확한 사실로 실재한다. 그러나 상자 밖의 관찰자(나)는 내부와 상호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두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적 중첩이 실제 상황으로 관찰된다.
이러한 차이는 관찰자마다 맺는 상호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어떤 속성이 한 관찰자에게 실재한다고 해서 다른 관찰자에게까지 실재한다고 보장되지 않는다. 대상의 속성은 독립적인 절대적 성질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순간에만, 그리고 특정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드러나는 국소적이라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관계론적 관점에서 세계는 절대적이고 연속적인 실체로 구성된 고전적 세계와 달리, 단편적이고 불연속적이며 사건과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전자가 지속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상호작용할 때 점처럼 나타나는 순간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하듯이, 물리적 실재는 상호작용하는 관찰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존재를 갖는, 상대적 변수들로 구성된 거대한 관계의 망이다.
이리하여 드러나는 세계는 희박한 세계이다. 이 세계 속에 있는 것은 확정된 속성을 가진 서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상호작용할 때만 속성과 특징을 갖는 존재들인 것이다. 사물의 미세한 입자들은 변수들이 상대적이고 미래가 현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이토록 기묘하고 작은 세계이다. 이 기묘한 양자 세계가 바로 우리의 세계이며, 양자얽힘은 사물들의 이러한 상호 의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본질적인 상대적 속성이다.
관계의 그물망: 양자얽힘
양자론의 핵심은 사물의 속성은 다른 사물에 상대적이며 상호작용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이러한 상호 의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현상이 '양자얽힘'이다. 양자얽힘은 슈뢰딩거의 지적대로 양자역학의 진정한 특징이다.
얽힘이란 두 사물이나 두 사람이 문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어떤 형태로 서로 얽혀 있는 상황이다. 양자역학에서 얽힘은 과거에 만난 적이 있는 입자 같은 물체가, 마치 서로 계속 대화할 수 있듯이 이상한 유대를 유지하는 현상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서로 얽혀 있고,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중국 과학자들은 최근 두 광자를 얽힌 상태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뜨려놓는 데 성공했다.2)얽힌 두 광자는 서로 연관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쪽이 빨간색이면 다른 쪽도 빨간색이고, 한쪽이 파란색이면 다른 쪽도 파란색이다. 가령 장갑 한 켤레를 따로따로 떼어 한쪽은 비엔나로 보내고 다른 한쪽은 베이징으로 보낸다고 하자. 비엔나에 도착한 장갑과 베이징에 도착한 장갑은 같은 색이다.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광자는 둘 다 빨간색인 상태와 둘 다 파란색인 상태가 중첩되어 있을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앞서 차일링거 실험에서 보았듯이, 관찰 행위가 개입하는 순간 간섭은 사라지고 중첩은 하나의 사건으로 수축한다. 실험에서 연구자가 광자의 경로 중 하나를 손으로 막으면, 두 경로를 동시에 따라가던 광자가 더 이상 중첩된 파동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하나의 경로만을 따라 한쪽 검출기에 도달했다. 즉, 관찰은 두 가능성의 결합을 깨뜨리고 단일한 사건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각 광자는 관찰되는 순간에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 판명된다. 양자적으로 중첩된 상태에 있는 한 쌍의 얽힌 광자를 하나는 비엔나로 보내고 다른 하나를 베이징에 보내고 한쪽이 빨간색이라는 것이 판명되면, 멀리 있는 다른 쪽도 빨간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각각 빨간색으로도 파란색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데, 왜 둘 다 항상 같은 색일까? 바로 이 점이 당혹스러운 부분이다.
양자론에 따르면, 우리가 보기 전까지는 두 광자가 각각이 빨간색으로 결정된 것도 아니고 파란색으로 결정된 것도 아니다. 색은 우리가 보는 순간 무작위로 색이 결정된다는 것이 양자론의 주장이다.
가능한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첫째, 한 광자의 색에 대한 신호가 멀리 떨어진 다른 광자에게 엄청난 속도로 전달된다는 설명이다. 둘째, 사실 분리되는 순간에 이미 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이것이 숨은 변수 이론이 주장하는 주요 논지다). 장갑의 경우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설명은 모두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설명이 맞다면 두 곳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신호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시공간 구조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에 반한다. 빛보다 빠른 속도는 없기에 동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가능성도 배제된다. 한 쌍의 장갑과는 달리, 광자가 멀리 떨어지기 전에 이미 둘 다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 알 수는 없다. 양자중첩 상태에 있기 때문에 관찰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아일랜드 물리학자 벨은 1964년 이 가능성을 부인하는 멋진 논문을 썼는데 오늘날 '벨 부등식'이라고 부른다. 즉, 만약 두 광자의 상관적인 속성이 모두 관찰되는 순간에 무작위로 결정되는 대신 분리되는 순간부터 이미 결정된다고 가정하면, 실제로 관찰되는 것과 명백히 모순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벨 부등식의 결과다. 따라서 상관관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참고 페이지: 벨 부등식
함께 있는 두 물체는 따로따로 있는 두 물체보다 더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물체와 다른 물체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두 물체가 함께 있는 경우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
$\psi_1$ 이 한 물체의 슈뢰딩거 파동이고 $\psi_2$ 가 두 번째 물체의 파동이라면, 직관적으로는 $\psi_1$ 과 $\psi_2$ 를 아는 것으로 두 물체에 대해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두 물체 전체에 대한 슈뢰딩거 파동은 개별적인 두 파동의 합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정보를 포함하는 더 복잡한 파동이다. 두 파동 $\psi_1$ 과 $\psi_2$ 에는 기록될 수 없는 가능한 양자 상관 관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두 물체 사이의 관계는 둘 중 하나에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우주의 모든 구성요소가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대상의 속성은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비엔나의 광자는 베이징의 관측과 직접 연결되지 않으며, 두 지역 사이에 정보가 교환되기 전에는 어떤 속성도 확정되지 않는다. 측정을 수행하고 있는 장치, 데이터를 읽고 있는 과학자, 그들이 메모하는 노트, 측정결과를 기록한 메시지, 이 모든 것이 양자적 대상이다. 베이징과 비엔나 사이에서 서로 연락을 취하기까지는 결정되지 않는다. 비엔나에게는 모든 것이 잠든 고양이와 깨어 있는 고양이의 중첩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측정 결과가 빨간색인 상황과 파란색인 상황의 양자적 중첩 상태에 있다. 베이징도 마찬가지 양자 중첩 상태에 있다.
두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말할 때, 우리는 사실 제3의 매개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상관관계는 두 대상이 모두 같은 제3의 대상과 상호작용할 때 실현된다. 양자 얽힘이 ‘원격 소통’처럼 보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 제3의 매개체, 즉 상호작용을 통해 정보를 통합하는 관찰자 혹은 기록 장치의 존재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두 대상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제3의 대상에 관한 사항을 말하는 것이다. 상관관계는 상관관계에 있는 두 대상이 모두 이 제3의 대상과 상호작용할 때 발현되는 것이다.
얽힌 상태에 있는 두 대상의 상관관계가 현실이 되려면 두 대상과 상호작용하는 제3의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얽힘은 둘이 추는 춤이 아니라, 셋이 추는 춤인 것이다. 즉, 결국 관찰하지 않는 한, 비엔나와 베이징의 광자는 고정된 속성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관계(셋) 속에서만 성질을 갖고,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때만 그 관계는 현실이 된다.
차일링거의 광자, 케이크의 온도계가 있다면, 측정은 한 대상(광자, 케이크)과 다른 대상(차일링거, 온도계)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이 끝나면 한 대상은 '다른 대상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온도계는 굽고 있는 케이크의 온도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이 의미는 두 대상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도와 온도계는 마치 두 개의 광자처럼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온도계와 관련하여, 케이크는 온도계와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그 자신의 속성(온도)을 나타내지만, 이 상호작용에 관여하지 않는 제3의 물리계와 관련해서는, 그 어떤 속성도 나타내지 않는다. 즉 케이크와 온도계는 얽힌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에게 일어난 일이다. '수면제 방출/잠든 고양이'와 '수면제 비방출/깨어 있는 고양이'의 양자적 중첩 상태인 것이다. 관찰하지 않는 이상 속성은 발현되지 않는다.
요컨대 얽힘은 현실을 엮는 관계 자체를 외부에서 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대상의 속성을 현실화하는 상호작용 과정을 통해 한 대상이 다른 대상(관찰자)에게 나타난 것이다.
외부에서 보면, 이 세계의 상태에 관해 우리가 가진 모든 정보는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 있다. 그리고 모든 속성은 오로지 상대적인 속성일 뿐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얽힘의 그물망 속에서만 존재한다.
정보는 유한하지만 무궁무진하다
말은 언제나 정확하지 않다. 말 속에 담긴 미묘한 색조와 맥락의 흔들림이 표현력을 만들어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말은 한 가지 뜻만 품지 않는다. 같은 단어가 다른 맥락으로 이동하면 전혀 다른 사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정보’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어떤 때 정보는 편지 속 의미를 읽어내기 위한 정신적 해석을 뜻하지만, 어떤 때는 단지 물리적 상태를 구별하는 최소한의 표시를 뜻한다.
우리가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정보는 이런 정신적 의미가 아닌, 물리적 의미의 정보다. 온도계가 케이크의 상태를 차갑거나 뜨겁다고 가리킬 때, 우리는 온도계가 케이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정보는 해석이 필요 없는 순수한 물리적 사실이다. 두 동전을 던졌을 때 가능한 경우의 수가 네 가지였지만, 두 동전을 서로 붙여서 투명한 조각에 넣고 다시 던지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로 줄어든다. 물리학의 언어로는 두 동전의 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혹은 두 동전의 면이 서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한 동전을 보면 다른 동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한 물리변수의 값이 다른 물리변수의 값에 영향을 주도록 얽혀 있을 때, 우리는 두 변수가 ‘서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정보'라는 단어는 정신적/의미론적 의미가 아닌 물리적 의미로 사용된다.
물리적 정보란 한 물리적 변수(물체)가 다른 물리적 변수(물체)의 값에 대해 어떤 함축(함의)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두 물체 속성 간의 상관관계 또는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정보가 있다’는 말은,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성립한다는 뜻일 뿐이다. 정보란 결국 관계다.
양자 물리학의 공준公準
고전 물리학과 양자 물리학이 구별 짓는 양자 역학의 핵심적인 두 가지 일반법칙 또는 공준公準이 있다.
1. 한 물리적 대상에 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관련 정보의 (최대) 양은 유한하다.
이 공준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연결된다.
2. 대상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새로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 공준은 비가환성(非可換性, non-commutativity)과 연결된다.
위 두 공준은 겉보기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준들이 '관련 정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모순되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면 이전 정보 중 일부는 '관련성 없는' 정보가 된다. 즉, 그 대상의 미래 행동 예측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정보는 유한하다 — 하이젠베르크의 원리
우리가 사물을 기술하려면 수많은 변수를 알아야 하지만, 그 변수들을 무한히 정밀하게 알 수는 없다. 세상을 무한히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무한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게 허용하지 않는다. 플랑크상수 $\hbar$ 가 바로 그 한계를 정한다.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에 이러한 사실을 밝혀냈다. 어떤 입자의 위치를 $\Delta X$만큼 정밀하게 알고자 하면, 그 운동량에 대한 정보의 정밀도 $\Delta P$ 는 $\Delta X$와 동시에 마음대로 줄일 수 없다. 두 정밀도의 곱은 플랑크상수 $\hbar$ 의 절반보다 작을 수 없다.
즉, $\Delta X \Delta P \ge \frac{\hbar}{2}$ (델타 $X$와 델타 $P$의 곱은 항상 $\hbar$의 절반보다 크거나 같다.)
물체의 위치($\Delta X$)에 관한 정보의 정확도와 속도($\Delta P$)에 관한 정보의 정확도를 동시에 임의로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세계가 무한히 연속적이지 않다는 물리적 진실을 보여준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한의 알갱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정보는 항상 유한한 양으로 한정된다.
정보는 무궁무진하다 — 비가환성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된다는 뜻은 아니다. 불확정성 원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입자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한 후 속도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측정은 가능하다. 다만 두 번째 측정이 끝났을 때 입자는 더 이상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아 위치에 대한 정보가 바뀌게 된다. 위치를 측정하면 속도 정보가 사라지고, 속도를 재면 다시 위치가 흐려진다.
더 놀라운 점은, 측정 순서가 결과를 바꾼다는 사실이다. 양자 역학에서 물리량 $X$와 $P$를 측정하는 순서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온다. 먼저 $X$ 를 측정하고 $P$ 를 측정한 결과와, 먼저 $P$ 를 측정한 후 $X$ 를 측정한 결과는 다르다. 수학적으로는 $XP - PX = i\hbar$ 로 표현된다.
이는 양자 세계에서 순서가 물리적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 즉 세계의 기본 구조가 비가환성을 보여주며, 하이젠베르크 원리가 이 방정식으로부터 도출된다.
디랙은 행렬(行列, Matrix)을 사용하지 않고 '$q$-수'를 사용하여 양자론을 단순화했다. 이는 순서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응하는 수학적 대상은 ‘비가환 대수’라고 불린다.
$P$를 측정하면 $X$가 변하기 때문에, 측정할 때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제2 공준과 연결된다.
거시 세계와 양자 세계
두 개의 공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세계는 연속이지 않고 입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한이 있어 사물이 무한히 작아질 수 없다."
"또한, 미래는 현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확률적이다. 물리적 사물은 다른 물리적 사물에 대해서만 속성을 가질 뿐이며, 이러한 속성은 사물들이 상호작용할 때만 존재한다. 실로 기묘하고 작은 세계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두 상태에 있다는 것은 고양이 자체가 두 가지 존재 방식을 동시에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그 고양이에 대한 완전한 정보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상태를 가리킨다.
간섭 역시 같은 논리다. 물리적 사물은 상호작용할 때만 속성을 가지며, 양자 간섭 현상은 대상을 최대한 고립시켜 관찰해야만 드러난다. 간섭이 관찰되지 않으면 '양자 중첩'이 없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작은 물체에 잘 격리된 경우에만 양자 간섭이 감지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양자 간섭은 거시적인 세상의 소란스러움에 묻혀버려 세상은 우리에게 늘 확정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세계를 큰 규모에서 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입자성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거시 세계는 많은 작은 변수들(개별 분자)의 평균치이다. 개별 분자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 전체를 보는 것이다. 너무 많은 변수가 관여하기 때문에 요동은 무의미해지고 확률은 확실성에 가까워진다. 흔들리고 요동치는 양자 세계의 무수히 많은 불연속적인 변수들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는 몇 개의 연속적이고 잘 정의된 변수로 귀착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달에서 바라본 모습과 같다."
“푸른 구슬의 매끈한 표면처럼 보일 뿐이다.”
양자론은 고전 역학을 포괄하며,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상 역시 근사치(近似値)로 포괄한다.
이는 마치 근시안(近視眼)인 사람이 냄비 속 끓는 물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지만, 눈이 좋은 사람이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양자론이 거시 세계의 현상을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분자 규모에서 보면, 강철 검의 날카로운 칼날도 폭풍우가 치는 바다의 가장자리처럼 거칠고 비뚤비뚤한 것으로 관찰된다.
고전 물리학적 세계가 견고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근시안적으로 평균화된 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고전 물리학이 제공해온 확실성은 사실 단지 확률일 뿐이다. 옛 물리학이 설명해 온 견고하고 확실한 세계의 이미지는 실제로는 환상이었다.
결론
양자론은 우리가 유한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측정 순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비가환적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제시한다. 이 모든 현상(정보의 유한성, 비가환성)은 플랑크 상수 $\hbar$ 를 포함하는 핵심 방정식들($\Delta X \Delta P \geq \hbar/2, XP - PX = i\hbar$)에 담겨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일상적이고 견고한 세계는 양자 역학적 확률의 평균화된 결과이며, 근본적인 실재는 불확정적이고 비연속적인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리하여 로벨리는, "이제 우리는 세계가 속성을 지닌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관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만 하는 곳에 도달했다. 이것은 양자론을 통해 우리가 세계를 발견한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론적 해석도 "참신한" 것만은 아니다. 로벨리는 그것을 동서양 사유의 깊은 철학적 층위에서 양자역학의 관계적 세계관을 찾는다.
다음 글에서 이러한 철학적 뿌리들이 어떻게 양자론의 관계적 해석과 연결되는지를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김정훈 옮김, 쌤앤파커스, 2023)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끝)
🔖 주(註)
1)카를로 로벨리,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김정훈 옮김, 쌤앤파커스, 2023), 93~111쪽.
2) 이것에 대하여 AI의 기술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광자는 서로 얽힌 순간부터 더 이상 두 개의 독립된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두 광자는 하나의 사건에서 동시에 태어나며, 그 사건은 보존량의 규칙을 파동함수의 형태로 새겨 넣는다. 이때 파동함수는 두 광자를 감싸는 하나의 구조로 존재한다. 각각의 광자에 독립된 상태를 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얽힘의 본질이다. 우리가 흔히 “광자들이 정보를 공유한다”고 말할 때, 그 정보는 고전적 의미의 값이나 메시지가 아니라, 이 파동함수 전체가 지닌 관계적 구조를 뜻한다.
중첩(superposition)은 보통 한 입자가 여러 가능성 위에 동시에 놓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얽힘 상태에서 중첩은 한 입자의 차원이 아니라, 두 입자가 함께 이루는 결합된 상태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편광 얽힘 상태인
$|\Psi^- \rangle = \frac{1}{\sqrt{2}}(|H\rangle_A |V\rangle_B - |V\rangle_A |H\rangle_B)$ 는
A는 H인지 V인지, B는 H인지 V인지 알 수 없는 상태임에도, 두 입자가 “반대 편광을 가져야 한다”는 규칙을 하나의 구조 안에 담아낸다. 즉, 얽힘은 개별 값의 공유가 아니라 가능한 조합들이 어떤 위상과 비율로 중첩되어 있는지에 대한 패턴을 공유하는 것이다. 여기서 파동함수는 두 입자의 개별적 상태를 주는 대신, 그 조합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관계망이 된다.
이 관계망은 단순한 수학적 추상물이 아니라 물리적 실재를 가진다. 중국의 양자위성 ‘묵자호(Micius)’ 실험에서 연구진은 두 광자를 서로 1,200킬로미터 떨어진 지상 기지국으로 분리해 보냈다. 그들이 확인한 것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두 광자의 측정 결과가 고전적 상한인 벨의 부등식 $(|S| \le 2)$을 넘어서 $(|S| = 2.37)$을 기록한다는 사실이었다(Nature, 2017). 이 위반은 고전적 숨은변수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양자적 상관성의 명백한 증거이며, 얽힘이 단순한 통계적 우연이 아니라 물리적 구조라는 객관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상관성은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다. 얽힘을 아무리 멀리 늘려도, 개별 광자는 언제나 50:50 확률로 무작위 값을 낸다. 측정 결과를 비교하는 순간에만 상관 패턴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얽힘은 값이나 정보를 “보내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두 입자를 하나의 양자상태로 묶어 두는 “관계적 질서”다. 그 질서는 파동함수의 진폭, 위상, 보존량의 대칭, 그리고 가능성들의 결합 패턴 속에 배어 있다.
결국, 얽힌 광자가 공유하는 것은 개별 값들의 중첩이 아니라, 두 입자가 어떤 조합의 중첩 속에 함께 놓여 있는지에 대한 구조적 정보다. 이 구조는 개별 입자가 가지는 속성 집합을 넘어선다. 부분추적을 통해 한 입자의 상태를 따로 떼어내면 완전히 무질서한 혼합상태가 나타난다. 하지만 둘을 함께 보면 완전히 질서 있는 순수 상태가 드러난다. 질서는 전체에만 있고, 개별에는 없다. 이것이 바로 얽힘이 말하는 관계적 실재다.
따라서 “얽힘은 무엇을 공유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되었다.
광자는 스핀값이나 운동량 같은 개별 값들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하나의 파동함수가 두 입자를 감싸며 규정하는 상관구조, 즉 결합된 중첩 상태의 정보다. 이 관계적 질서가 공간을 넘어선 상관성을 낳고, 벨 부등식 위반이라는 실험적 사실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구조적 정보의 실재성이 바로 양자세계가 고전적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이다.
※ 기반 연구: Yin, J. et al., "Satellite-based entanglement distribution over 1200 kilometers", Nature 546, 640–646 (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