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박 3일간의 이르는 지리산 종주, 그 정점인 천왕봉을 오르기 전 마지막 쉽터가 장터목 산장이다. 천왕봉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모두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다.
그중 첫 번째, 단돈 520원만 갖고 대학생 둘이 생애 첫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그러나 모자랄 것 없이 지낸 그들에게 지리산에도 현금인출기가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돈이 없어 라면도 못 먹고, 담요도 빌릴 수 없어 잠도 잘 수 없다. “돈 뽑으려고” 했으나 현금인출기는 지리산 어디에도 없다. 지리산 첫 산행이 정말 고행이다. 그러나 천왕봉에 오르고 나면 그들은 동년배의 친구들과 달리 자신감을 가질 것이다.
퇴직하고 2년이 넘은 60세 ‘백수’도 지리산을 찾았다. 퇴직하고 한두 해는 좋았으나 이제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른바 황혼백수의 서글픈 삶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았다. “산 아래 있을 때는 머리가 복잡한데 산 꼭대기만 올라가면 이상하게 그게 없어져. 근데 그것이 높은 산에 가면 그 높이만큼 그 깊이는 커진다.” 인생의 한 켠으로 물러났다는 생각에 찬바람이 가슴을 쓸고 지날 때 그 작아진 뒷모습을 지리산은 너그럽게 쓰다듬어 준다.
몇 년 전 지리산을 처음 찾고나서부터 이제는 지리산에 푹! 빠져 매년 지리산을 찾는다는 60대 자매는 지리산 갈 때마다 “애인 만나는 기분”이라고 한다. 자매는 “지리산에 오면 엄마가 아닌 나를 찾을 수 있어” 좋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돌아가신 친정 엄마의 품같아 그런지 모른다.
장터목 산장의 저녁노을은 유난히 넓고 깊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3도에 걸쳐 펼쳐진 지리산 자락 그 깊은 골짜기까지 노을빛에 붉게 물들기 때문이다. 9살인 진아는 벌써 지리산 종주만 10번째다. 붉게 물든 저녁 노을 빛을 바라보며 진아네 가족은 장터목 산장 ‘마당’에서 늘 비박을 한다. 밤 하늘의 별이 참으로 많고, 별들은 푸르게 빛난다. 다음날, 진아네 가족은 느즈막에 아침을 먹고 산장을 떠나 천왕봉을 향해 ‘정복’이 아닌 산등성이를 따라 자연을 느끼며 걷는다.
그 자리에 어릴 때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장터목 대피소에 왔다. 성한 사람도 힘든데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궁금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후 천왕봉을 향해 걸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평생 한 번 지리산에 와 보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목발에 의지한 채 한 발 한 발 천왕봉에 오른다. 그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천왕봉에 올랐다. 보통 사람의 두 배 가까히 들었지만 자신의 힘만으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지금 이곳에서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발 아래 펼쳐진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넓다. 그는 말했다. “오늘을 계기로 뭐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겠다.”
노고단에서 장터목에 이르는 26km 종주 능선, 그 지리산 기슭에 사는 한 사람이 있다. 10여 년 전 대구에서 이곳 지리산으로 이사하였다. 80년대 대학교를 다닌 386세대다. 이곳에서 결혼하고 6남매를 낳았다. 그는 이곳 지리산에 자연학교를 세우는 것이 꿈이다. 그는 “지리산은 역사적 공간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그런 장소이기보다 이제는 자연을 배우는 생명의식의 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리산에 새긴 역사의 아픔도 약이 되는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저항과 갈등이 아닌 생명과 평화의 지리산을 노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격동의 80년대를 거쳐 중년이 된 한 386세대의 고백이다.
장터목 산장에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우체통이 하나 있다.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글씨로 편지를 써서 보내면 발신인 주소는 ‘지리산 장터목 산장’이라는 소인이 찍혀 있을 것이다. 장터목 산장에서 날아온 엽서 한 장,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편지가 아닐까!!
그러는 사이 장터목 산장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산장에 지친 몸을 맡긴다. 저녁을 해 먹고,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보며 별과 함께 장터목 산장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몸은 고되지만 마음만은 편한 밤이다.
새벽 4시 30분, 동 트기 전 다시 장터목 산장의 하루가 시작된다.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 길을 나섰다. 서로 약속이나 한듯 머리에 불을 밝힌 모습이 마치 순례의 행렬 같다. 천왕봉의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천왕봉에 오르면, 사람들은 일출을 보며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빈다.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병을 낮게 해달라는 50을 넘긴 아들의 기도가 간절하다. 20대 중반의 여성은 작년 지리산 일출을 보고 나서 남자 친구가 생겼다. 몸과 마음은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날 새벽, 산의 기운이 그들의 몸에 깃들고 있었다.
아침 7시, 천왕봉에 올랐던 사람들은 산을 내려가고, 장터목 산장은 이제 직원들만 남았다. 여기서 하루밤을 보낸 이들은 가슴깊이 쌓아둔 먼지를 털어내고 떠났다. 버거운 짐을 지고 지리산을 찾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거운 짐은 지리산의 넓은 틈에 내려놓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일상을 향해 돌아간다.
3살밖이 아기 윤아는 아빠 등에 업혀 여기까지 왔다. 아기까지 데리고 지리산에 올라온 젋은 엄마는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정리된 느낌인거 같아요.”라고 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열심히 살아야죠. 애가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말하랴!
하지만 그들은 삶이 지치고, 견디기 힘들면 다시 지리산을 찾을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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