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0월 8일 버스에 실려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던 지강헌(당시 34세) 등 12명의 미결수들이 교도관을 덮쳐 권총을 빼앗고 탈출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은 범행에 비해 형량이 지나치게 높은 소위 ‘10년 이상의 보호감호’라는 법의 불평등 때문에 ‘어차피 청춘을 감옥에서 썩을 거 어디론가 도망가서 붙잡히지만 않으면 지금보다야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탈출했노라고 일주일후 최후의 도피처인 서울 북가좌동 가정집에서 그들을 포위한 경찰들을 향해 말했다.
이들 중 5명은 3일이 못가서 검거되었고 지강헌을 포함한 나머지 7명은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 서울의 안암동-행당동-문정동의 가정집을 차례로 숨어 다니며 도피행각을 버렸다.
탈주 7일째 되는 날, 탈주범들은 신촌에서 전두환을 잡으러(?) 연희동으로 가다가 경호가 살벌하여 포기하고 다른 도피 장소를 물색하던 중 경찰에 발각되어 1명은 검거되었고, 2명은 자수하였다. 그러나 지강헌을 포함한 나머지 4명은 창천동의 한 가정집으로 다시 도피, 이곳에서 1박 2일을 보낸다. 네 번째 도피처였다.
탈주범들에게 이곳에서의 1박 2일은 특별했다. 비록 수배자 신세였지만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난에 대한 멸시와 약자에 대한 차별이 아닌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장 인간적인 삶을 보낸 시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천동 가정집에는 22세 여대생 딸과 어머니, 그리고 일흔이 넘은 아버지가 있었다. 가족들 앞에 TV에서 보던 바로 그 탈주범들이 들이닥쳤다.
가족들은 그들도 사람인지라 침착하게 대응했다. 탈주범들은 TV에서 보던 그런 ‘흉악범’이 아니었다. 비록 ‘도둑질’ 때문에 범죄자로 살아가지만 그 또한 약자에 대한 법의 차별적 적용에 불만을 품은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는 청춘들일 수 있었다. 말은 순수했으며 행동은 얌전했다. 가정집 아버지가 그들을 향해 한마디 했다. “밥은 먹었냐?”
도피중인 탈주범인줄 모르진 않을 터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빨리 밥부터 차리라”라고 얘기하였다. 어머니는 고추장 치개를 끓여왔고, 탈주범들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배가 고팠는지 맛있게 먹었다. 밥을 먹는 모습은 여느집 아들들 같았다. 가정집 딸은 밥을 먹는 그들에게서 “나쁜 범죄자의 냄새가 아닌 인간다운 눈빛을 보았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사람사는 곳인데 신발은 벗고 다녀야 하지 않겠냐, 더럽혀진 마루를 닦으라!”고 하자 탈주범들은 마치 아버지의 권위에 눌린 자식처럼 걸레를 집어들고 마루를 닦기도 하였다.
그렇게 돈 없고 ‘빽’이 없어 사회 밖으로 내쳐진 자신들에게 가족들이 식사를 대접하며, 인간적으로 대해준 것에 탈주범들은 행복해 했고, 가족들 또한 탈주범들을 신고할 마음 없이 그들 스스로 나가 자수하기를 바랬을 뿐 그들 서로는 어떠한 증오와 멸시도 없이 ‘인간의 표준’이 아닌 ‘다르되 평등한 사람’으로 대했다.
저녁 식사 후 탈주범들은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했다. 가족들과 이런저런 얘기도 했다. 가족 중 딸은 탈주범들에게 성경의 구절을 들려주었다. 자수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성경을 듣던 지강헌이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온 듯 말했다. “어떻게 죽는 것이 멋있는 것이냐, 내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마음이 되게 기도를 해달라”라고 했다. 지강헌은 어쩌면 마지막 탈주일지 모를 지금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딸은 “그런말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지강헌의 완강한 요구에 딸은 어쩔수 없이 무릎을 꿇고 지강헌과 함께 기도를 했다. 기도 소리에 지강헌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지친 영혼이 울고 있었다. 콧물이 바닥에 떨어지며 한없이 흐느꼈다.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서러움과 외로움의 눈물이었다. 가난과 편견으로 멸시받은 상처, “시인이 되어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으나 이제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삶의 마지막 여정을 향해 또다시 이곳을 떠나야할지 모른다. 성경을 들려주며 자수를 권유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모르진 않을 터 차라리 창천동 집을 빠져나와 가족들에게 자신들로 인한 짐을 덜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기도를 마친 지강헌과, 나머지 탈주범 3명은 결국 창천동의 집을 스스로 나왔다. 이 사회에서 살아갈 곳이 없는 그들이다. 부자들의 돈 몇 백만 원 훔친 ‘가난의 원죄’로 그들은 감시와 처벌을 피해 끊임없이 어디든 탈주를 감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1988년 10월 15일 토요일 밤 9시 40분경 그들에게 최후의 도피처가 될 서울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으로 갔다. 대문이 열려 있어 스스럼없이 들어갔다.
이번에도 북가좌동의 가족들은 탈주범들에게 손님처럼 대해주었다. 그들 또한 가족들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이 탈주한 이유를 가정집 사람들에게 설명했을 뿐이다.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은 살인을 해도 석방되고, 누구는 단지 돈 몇 백만 원 훔쳤다고 보호감호를 포함한 징역 10년 이상의 형을 받고, 이런 법의 불평등을 고발하겠노라고 했다. 탈주범들은 이 가정집 뿐만 아니라 지난 일주일간 거쳐온 4곳의 도피처에서 늘 그렇게 말했고 그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으며 밥만 얻어 먹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 어둡다. 탈주범들은 범죄자로 낙인 찍힌, 그래서 사회 밖으로 배제될 격리 대상일 뿐이다.
그날 새벽, 북가좌동의 가정집 아버지는 탈주범들이 잠시 잠이 든 사이 밖으로 빠져나가 경찰에 신고했다.
곧바로 경찰들이 출동하였고 무장 경찰들이 가정집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자 탈주범들은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다. 아니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탈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경찰 또한 탈주범들을 체포하려 했지만 인질 때문에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탈주범들은 인질을 미끼로 경찰과 밀고 댕기는 신경전을 벌였고, 경찰은 탈주범들의 가족과 여자 친구까지 동원하며 설득의 심리전으로 맞섰다. 동시에 저격수도 배치했다. 그러는 사이 새벽은 가고 아침이 찾아왔다. 탈주범과 경찰의 대치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탈주범들끼리 자수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탈주를 감행할 것인가에 대한 복잡한 혼돈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2명은 지강헌이 갖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했고 1명은 자수할 뜻을 비쳤다. 그는 당시 21세의 강영일이었다. 지강헌은 자수를 머뭇거리는 그에게 “영일아, 네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내 마음을 갖고 가라”며 강영일을 총으로 위협하며 자수를 강압했다. 지강헌의 ‘내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북가좌동 가정집에는 인질을 제외하고 지강헌 혼자 남았다. 그 적막 속에 북가좌동 가정집은 두려움으로 가득찼고, 죽음의 어두운 구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집 주위는 무장 경찰 1,000여 명이 에워싸고 있었다. 더 이상의 탈주는 불가능한 상태다. 적막한 혼돈의 시간은 가고, 자수하여 살아 나가도 사는 것이 아닌 상태, 그러면 이제 선택은 한 가지 뿐이다. 삶을 포기하고 최후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자 북가좌동 가정집은 혼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뭔가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찾아왔다. 최후를 준비하는 섬뜩함도 갔다.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약자에 대한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과 법의 불평등을 고발하고자 탈주를 감행했던, 북가좌동 가정집 최후의 1인 지강헌은 조용한 ‘휴일’의 아침을 맞았다.
1988년 10월 16일, 휴일의 늦은 아침 햇살이 가정집 창문을 비추고 있었다. 눈부신 가을 햇살이었다. 지강헌은 창문에 기대고 밖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내가 이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살아갈 곳이 없구나!!” 그는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일’의 아침처럼 평화롭게 말이다.
지강헌은 노래가 듣고 싶었다. 노래를 들으며 '휴일의 평화를 느끼고 싶은 것이다. 지강헌은 비지스(Bee gees)의 홀리데이(Holiday) 노래를 경찰에게 들려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은 지강헌의 요구를 들어줬다. 탈출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마지막일지 모를 지강헌의 요구를 경찰은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경찰이 카세트 테이프를 틀자 노래는 확성기를 타고 집안으로 흘러들어갔다. 경찰 저격수 2명이 지강헌을 조준했다.
"Ooh you're a holiday , ev'ry day , such a holiday(당신은 휴일같은 사람입니다, 매일 휴일같은 사람이에요) Now it's my turn to say , and I say you're a holiday(이제 내가 말할 차례에요, 그리고 당신은 휴일 같은 사람입니다)…"
노래는 휴일의 아침처럼 편안했다. 정말 편안했다. 그는 평화로웠고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래는 가난과 멸시와 편견에 지친 그의 영혼을 슬프게 달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삶은 그에게 더 이상 그 어떠한 행복도 줄 수 없음을 알려주는 듯 했다. 지강헌은 죽음이 그리워졌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했다.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휴일’의 편안함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휴일’같은 사람에게, 550만 원을 훔친 죄로 7년 형과 보호감호 10년의 족쇄를 채운 그에게, 지강헌이라는 하나의 소중한 존엄에게 죽음의 자유마저도 빼앗아 갔다.
경찰의 저격수가 두 발의 총격을 가했다. 한 발이 하복부를 관통하였고, 그는 고통스럽게 쓰러졌다. 이때 그의 옆에는, “미안하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하겠다.” 며 용서를 구하던 지강헌에게, 그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며 지난 밤 많은 얘기를 하며 짧은 시간이나마 삶의 행복을 느끼게 해준 하룻밤의 ‘동반자’ 였던 북가좌동의 가정집 딸이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의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그녀는 지강헌을 보고 울부짖었다.
총을 맞은 지강헌의 의식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어릴적 추억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만이 가슴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죽어가는 지강헌을 가슴에 안았다. 그 짧은 시간 정이 든 것이었을까? 아니 사랑했는지 모른다. ‘당신은 휴일 같은 사람, 그건 정말 무정하다고 할 거예요, 당신은 정말 휴일 같은 사람... 띠 띠띠 띠, 띠 띠띠 띠....’
노래는 계속 슬프게 흘러나왔다. 식어가는 그의 몸은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의 1년차 어느 레지던트 의사 앞에 실려 갔다. 의사는 흉부외과 의사였다. 복부를 다친 환자를 흉부외과 의사에게 맡긴 것이었다. 지강헌은 수술도 받지 못하고 ‘천천히 그리고 쓸쓸하게 그 의사의 품’에서 죽었다. 신문과 방송에서 묘사한 것처럼 ‘광란과 공포의 휴일 아침’은 이렇게 홀리데이(Holiday)와 함께 끝났다. 당신은 정말 휴일 같은 사람... 띠 띠띠 띠, 띠 띠띠 띠....(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575176.html)
당신은 휴일같은 사람입니다.
정말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은 휴일같은 사람입니다. (....)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알아요
왜 내가 아직도 눈이 멀었는지를
다른 사람이 나라면
그건 정말 무정하다고 할거예요
당신은 정말 휴일같은 사람입니다.
정말 매일 휴일같은 사람
자수한 강영일은 ‘지강헌의 내 마음’을 전했을까? 전했다면, 누구에게? 그러나 이 사회는, 불평등과 편견을 고발하고자 했던 어느 죄수의 외마디 비명에 눈감고 그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외침을 ‘광란과 공포’라니, 아직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아닙니까?(끝)
*2020년 10월 내가 가입한 네이버 밴드에 올린 글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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