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그 생명의 영속성, 그리고 인문학

지구의 모든 생명이 가진 보편적 속성은 무엇일까? 죽음이다. 적어도 지구에서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죽는다. 생명의 한계성이다. 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생명은 영속성을 지닌다.

태초에 생명의 늪에서 우연치 않게 자기를 복제할 줄 아는 어떤 분자가 생겨났다. 후일 우리는 그것이 DNA임을 알아냈다.DNA는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저장하는 ‘물질’이다. DNA가 하는 일은 끊임없는 자기 복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지금까지 보존된 이유가 이 DNA 복제능력 때문이다. 유전자는 DNA라는 분자 안에 보존되어 스스로 복제하며 지구상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한 35억 년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구 생명의 역사는 DNA의 일대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한계성을 지닌 객체지만 생명을 만들어낸 DNA 유전물질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므로 생명은 한계성과 동시에 영속성도 지닌다. DNA는 한번도 끊어지지 않았다.유전자의 영속성을 또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금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의 조상은 하나라는 점이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의 유전자는 동일한 종류의 분자다. 박테리아에서 코끼리까지, 그리고 인간의 유전자는 모두 DNA라는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DNA가 합쳐져서 왔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지로부터 왔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러다 더 가다보면 최초의 인간 어느 분은 침팬지와 굉장히 가까웠던 공통 조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조상은 그 전에 누군가에서 나왔다. 그러면 최초의 분자 DNA와 만나게 된다.

DNA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생존기계’)를 만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세포를 만들고, 이 단세포는 박테리아가 되고 다시 변이와 복제오류를 거듭하다 5억 4000만 년 전 캄브리아기(지질학적 구분)에 오면 수많은 종의 생명체가 마치 폭발하듯 탄생하면서 이제 DNA는 세상을 조정한다. DNA가 세상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와중에 물고기도 탄생하였다. 어쩌다가 물고기가 물속에서 유전자를 보존하고 복제하는 역할을 하는 생존기계의 하나가 된 셈이다.이후 3억 7500만 년 전즈음에 이르면 물고기들 중에 일부가 육지로 올라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물고기가 육지로 기어 나온 이유는 모른다. 저 대양의 지판(地板)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출렁거려 물고기가 육지로 내동댕이쳐진 것일 수 있겠으나, 그것은 단지 우연일 따름이다. 하여튼 물고기가 육지로 탈출한 지 수억 년이 지났다. 그러자 그 물고기 지느러미는 차츰 팔과 다리로 변해갔다. 땅을 짚고 걷거나 뛰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 물고기는 점차 양서류, 파충류 등 육지동물로 진화하다가 약 2억 년 전에포유류가 나타났다.

다시 1억 수천만 년이 지났다. 중간에 공룡 시대가 있었으나 6,000만 년 전 소행성의 충돌로 모두 멸종하였다. 공룡시대 땅속에서 숨어살던 포유류가 세상에 나왔다. 수천만 년이 지나자 일부가 영장류로 진화하였다. 영장류는 다시 여러 동물들로 가지를 쳤다. 원숭이도 그중 하나다. 그러다가 600만 년 전에는 원숭이로부터 분화된 최초의 인류가 가지를 친다. 형태만으로는 인류 조상인지 또는 유인원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하여튼 두 발로 걸었다.200만 년즈음에는 불과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류가 나타났다. 우리는 그 영장류를 ‘호모종’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흘러 20만 년 전에 이르면 드디어 호모 사피엔스(인간)라는 동물이 태어난다. 이제 분화라는 가지의 맨 끝에 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인간은 어쩌다가 우연의 결과로 그냥 엄청난 확률로 태어났다. 곱하고 곱하고 곱해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 인간의 탄생이다. 물고기의 DNA가 변이를 거듭하며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하고 이제 인간도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가 된 것이다.

이것이 164년 전 찰스 다윈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준 진화론의 내용이다. 찰스 다윈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태초에 하나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종의 기원』 에서 주장했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시공간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태초에 하나로부터 이렇게 아름답고 대단한 형태의 생명들이 진화해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그 당시 다윈은 DNA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찰스 다윈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로부터 왔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존재를 밝혀냄으로써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됐다.

하지만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 DNA 존재를 알아버렸다는 사실이다. 1953년 DNA의 구조를 밝혀낸 제임스 왓슨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인간은 DNA의 존재를 알아버린 유일한 동물이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DNA가 뭔지 모른다. 다만 인간만이 그 존재를 안다. 지구 생명의 역사 끝자락에서 인간은 결국 그 비밀을 알고야 말았다.그 결과 유전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우리 몸은 이제 스스로 “지구에서 유일하게 유전자의 폭력에 항거할 수 있”게 되었다, 고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에서 말했다.

유전자는 연약하기 그지 없는 인간에게 척추동물로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뇌’(인체의 기능을 조절하는 뇌간, 중뇌, 소뇌 등) 외에 지구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성의 뇌’(대뇌 피질)를 장착시켰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자 이성의 뇌가 결국 인간의 모든 행동을 장악하고 만 것이다.물고기에서 시작된 진화의 긴 여정에서 탄생한 인간의 뇌는 이제 지구 밖 우주까지 이어지고 있다. 생명 탄생의 비밀을 알고자 했던 뇌는 우주 먼지가 생명 탄생의 시원임을 알았다. 물고기가 ‘바다를 탈출’한 지 수억 년이 지난 지금 그의 몸을 지탱하며 바드락거리던 지느러미는 우주 탐사선 보이저 2호를 원격 조정하며 지금은 태양계를 벗어나 안드로메다로 향해하고 있으며, 몇몇 ‘이기적 인간’은 화성으로 떠날 채비도 하고 있다.

이 모두가 가능한 것은 인간이 앎을 추구한 결과다. 뇌가 그 역할을 하였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 쌓인 ‘빅 데이터’는 인간을 아주 똑똑하게 만들었다. 인공지능을 만들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할 수 있도록 했다. 유전자의 생존기계인 인간은 거꾸로 뇌를 이용하여 자신의 유전자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유전자는 이제 뇌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단백질을 만들어낼 수 없을지 모른다.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잘라내어 단백질 엉킴을 방지하여 병을 예방하고,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결손된 염색체 하나를 다시 세포핵 안에 집어넣을 정도로 인간의 뇌는 20만 년 동안 그렇게 뛰어나게 발달했다.자연과학(물리, 생물 등) 인문학(사회,문학 등) 사회과학(고고,인류학 등) 등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섭’의 원리 아래 인간의 뇌는 인류 문명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있다.

인간 빼놓고 그 어느 세상에도 앎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동물은 없다. 유전자의 ‘폭력’에 항거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방법은 책이 유일하다. 책 안에 인류의 모든 지식이 담겨있다.그러나 취미독서로는 불가능하다. 기획독서이어야 한다. 내가 모르는 분야를 하나하나 공략해야 한다. 분석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진화심리학이 뭔지 모른다, 나노 과학은 뭘까? 모르는 분야는 안 읽힌다. 하지만 그걸 붙들고 씨름하다보면 첫 번째 책은 안 읽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책에 가면 신기하게 읽힌다. 그러면 어느덧 그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 지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끝)

🐒 이 글의 많은 부분은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강의 동영상 ‘생명,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2023년 1월 내가 가입한 네이버 밴드에 올린 글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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