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운동화 한 짝

시내 한 복판에서 벌어진 대학생 기습시위에 우연히 자기도 모르게 휩쓸려가게 된 연희(김태리 분)가 백골단에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간다. 이 모습을 본 어느 남자 대학생이 연희를 잽싸게 낚아채 백골단을 물리치고 인근 신발 가게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백골단이 쫓아오며 문을 열려고 하지만 가게 여주인은 “장사 끝났어요”하며 재빠르게 문을 닫아버린다. 몇십 분이 흘러 백골단이 돌아가고 위험이 없어지자 남자 대학생은 얼굴을 가렸던 수건을 벗는다. 영화관은 일순 탄식과 감탄으로 술렁거렸다. 관객들은 그가 배우 강동원인 것만 알 뿐 영화 속 인물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둘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아뿔싸! 그만 남자 대학생의 신발 한 쪽이 시위 도중 벗겨져 없어진 것이었다.

스크린에 비친 한 쪽밖에 없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하얀 운동화다. 누구의 운동화일까? 관객들은 3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어느 대학교 정문 앞에서 신발 한 쪽이 벗겨진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그 남자 대학생’을 떠올리며, 운동화 한 쪽을 잃어버린 배우 강동원이 앞으로 전개될 영화 속 실제 인물이 누군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가게 주인이 이대로 나가면 위험하니까 5천 원만 주면 새 신발을 주겠다고 하였지만 돈이 없다고 하자 연희가 대신 사준다. ‘그 남자 대학생’은 연희가 사준 하얀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영화 마지막 장면. 어느날 연희는 ‘그 남자 대학생’의 모습을 신문에서 본다. ‘그 남자 대학생’은 의식을 읽고 피를 흘리며 또 다른 대학생의 부축을 받으며 길 한 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 대학생’은 연희가 신발 가게 안에서 처음 만난 날처럼 신발 한 쪽이 벗겨져 있었다. 그때, 그, 하얀 운동화 한 켤레 중 한 쪽이었다. 연희는 일순 알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을 쏟는다. 그리고 광장으로 달려간다.

이미 광장은 수많은 시민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운동권 대학생을 향해, 87학번 연희는, 어른들이 부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그날이 올까요”라며 현실에 냉소적이고, 음악 카세트 마이마이를 귀에 꽂고 세상일에 귀를 닫고 살던 연희는, ‘그 남자 대학생’을 만난 후 광주 5.18을 알게 되었고, 죽음의 진실을 알리려는 외삼촌의 편지를 외부로 전달하며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시대 전복의 흐름에 동화되어 가고 있을 즈음, 어쩌면 ‘그 남자 대학생’은 그렇게 진실을 외치다 백골단이 쏜 최루탄에 맞아 죽어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을 삼킬 듯 커다란 분노의 외침들이 광장에 울려퍼졌다. 버스 등에 올라탄 연희는 눈 앞에 펼쳐진 수십 만의 시민들을 보았다. 87학번 연희가, 처음으로 진실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끝)


*2017년 12월 내가 가입한 네이버 밴드에 올린 글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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