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연설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예리한 관찰력과 논리 정연함으로 이름을 알린, 검사 출신의 대통령이었다. 한때는 어눌한 말솜씨와 부족한 자신감으로 연설에 약점을 보였지만, 수많은 조언과 수개월의 연습 끝에 이제는 능숙한 화술과 매력적인 목소리로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연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언어상실증 환자들이었다. 그들은 왼쪽 관자엽의 장애 때문에 단 하나의 단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었고, 나중에는 TV 속의 대통령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환자들은 대관절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대통령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걸까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 걸까? 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을까?

우리는 발화(發話)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각적인 단서뿐 아니라 언어에 수반되는 모든 단서를 알아야 한다. 시각적인 단서란 표정, 몸짓, 거의 무의식중에 나오는 버릇이나 태도를 말한다. 말투, 목소리의 높낮이, 시사적인 강조, 억양 등을 가리킨다. 발화는 그 사람의 존재와 의미를 담고 있는 음이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단어만을 알아서는 불충분하다.

단어와 문법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가만히 들어보면 말에는 반드시 나름대로의 말투가 있다. 얼굴에는 말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표정이 있다. 이 표정은 대단히 깊이 있고 다양하며, 복잡 미묘하다.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 표정이다. 언어상실증 환자들의 경우, 때때로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이해하는 힘을 잃기는커녕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더욱 뛰어난 힘을 갖는다.

언어상실증 환자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듣고 속는 일도 없다. 대신 그들은 언어가 갖는 표정을 간파한다. 종합적인 표정, 언어에 수반되는 표정을 느끼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해서 거짓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표정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그 표정을 간파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어상실증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면 금방 들통 난다.

“입으로는 거짓말을 해도 표정에는 진실이 드러난다”고 니체도 말했지만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표정, 몸짓, 태도에 나타나는 거짓과 부자연스러움을 민감하게 파악한다. 설령 상대가 보이지 않더라도 인간의 목소리에 담긴 모든 표정, 즉 말투, 리듬, 박자, 음악성, 미묘한 억양, 음조의 변화, 높낮이 등을 날카롭게 파악한다. 진실하게 들리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좌우하는 것이 표정인 것이다.

그래서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면서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대통령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표정과 음색에 대해서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언어상실증 환자에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언어상실증 환자와 정반대의 증상을 가진 환자의 경우에는 어떨까? 즉, 단어를 이해하는 힘은 있지만 목소리의 표정과 음색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사람의 경우다. 그들은 음색인식불능증 환자다. 말의 의미는 물론 문법구조까지도 완벽하게 이해하지만 말투, 음색, 느낌, 음 전체의 성질 등 목소리는 파악하지 못한다. 언어상실증이 왼쪽 관자엽의 장애에 원인이 있는 데 반해 음색인식불능증은 오른쪽 관자엽의 장애로 인해 일어난다.
음색인식불능증 환자 중 에밀리 D는 예전에 영어교사였고 이름이 조금 알려진 시인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오른쪽 관자엽에 신경아교증으로 목소리에 담긴 희로애락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읽어낼 수 없기 때문에 말들 들을 때면 상대방의 얼굴과 태도와 움직임을 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심한 녹내장으로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져 그것도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내키는 대로 말하는 대화투의 말이나 속어, 에둘러 하는 말이나 감정이 담긴 말 따위를 점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발화자에게 앞뒤가 또박또박 들어맞는 문장으로 말할 것을 요구했다. 문법적으로 깔끔하게 정비된 문장이라면 말투와 감정을 못 느끼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녀는 서술적인 문장을 말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 적절한 단어를 골라서 서술적으로 말하면 의미를 잘 알아 들었다. 그러나 감정이 담긴 말의 경우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억양과 감정이 담겨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밀리 D도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연설을 듣고 감동하지 않았다. 어떤 연설을 듣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움직일 리가 없었다. 감정에 호소하려는 목적을 가진 연설은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녀의 마음을 손톱만큼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설득력이 없어요. 문장이 엉망이고 조리도 없어요. 머리가 돌았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해서 대통령의 연설은 언어상실증 환자들뿐 아니라 음색인식불능증 환자인 에밀리 D를 감동시키는 데 실패했다. 에밀리 D의 경우에는 문장과 어법의 타당성에 대해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언어상실증 환자의 경우에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말투와 얼굴 표정을 보고 대통령의 말이 거짓임을 알아차렸다. (끝)

📌 이 글은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올리버 색스가 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알마출판사, 2016) p145-151를 요약 편집한 것이며 2022년 3월 내가 가입한 대학교 네이버 밴드에 올린 글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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