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관계론의 확장: 마음과 양자의 세계

단순한 물질에서 어떻게 '의미'가 탄생할까요? 카를로 로벨리는 정보와 진화의 결합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관계론적 양자역학을 통해 의식과 물질의 경계를 허물고, 마음의 물리적 기원을 재해석하는 현대 물리학의 통찰을 만나보세요.


박테리아가 포도당의 농도를 감지해 이동 방향을 결정할 때, 그 내부의 생화학적 상태는 외부의 먹이를 정확히 가리킨다. 이때 물리적 상관관계는 비로소 '지향성'을 획득하며, '의미'라는 현상이 자연계에 최초로 등장한다.(이미지 출처: AI생성 후 pages 제작)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은 오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통찰을 남겼고, 그의 사유는 관계론적 양자역학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양자 세계에서 사물의 상태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다른 사물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모습을 갖추기 때문이다. 세계는 '있는 것들'의 집합이 아니라 '만나는 것들'의 얽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관계론적 세계관을 마음의 문제로 확장할 수 있을까? 로벨리는 다시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서론: 단순한 물질

양자의 세계는 일상의 직접적인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본질과 같은 미해결 질문과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음의 작용이 양자 현상이어서가 아니라 양자의 발견으로 물리적 세계와 물질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바뀌어 질문의 조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단순한 물질,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의 생각과 지각, 주관성, 가치, 아름다움, 의미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단순한 물질'이 어떻게 색, 감정, 내가 존재한다는 생생하고 뜨거운 느낌을 만들어낼까라는 질문 말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이러한 질문에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큰 규모에서 뇌의 기능과 관련된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것이 로벨리의 물리학이다.

양자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본성에 대해 잘못된 직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물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잘못된 직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을 단순히 "서로 부딪혀 튀어오르는 작은 돌멩이들"로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돌멩이 하나도 광활한 세계이다. 확률과 상호작용이 요동치는, 이글거리는 양자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미세한 입자가 질량과 운동만을 가진 물질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 무정형의 입자로부터 우리의 복잡한 지각과 사고를 재구성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 미세한 입자들을 관계의 관점에서, 즉 다른 것들과의 관계 없이는 속성을 갖지 않는다고 본다면, 물리적 세계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이미지들의 정교한 직조로 짜여 있다면, 그러한 물리학에서는 우리가 지각과 의식이라고 부르는 복잡한 현상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는 요소들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전자와 양성자 같은 물질에게 '원(proto)-의식'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자전거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각 원자가 '원(proto)-사이클링'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범신론은 설득력이 없다. 생각과 지각 또는 주관성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 변수들과 그 상관관계로 세상을 가장 잘 기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음의 작동과 물리적 현상은 모두 자연현상으로 볼 수 있다. 두 가지 모두 물리적 세계의 부분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은 물질을 견고한 실체가 아닌 '상호작용의 관계망'으로 재정의한다. 이러한 관점은 물질과 정신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에 분명한 반대를 표시하며, 마음을 물리적 세계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산물로 통합하는 길을 열어준다.

의미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다. 언어의 낱말은 무언가를 '의미'한다. 책을 보는 독자는 종이 위에서 검은 선의 이미지를 보고 있을 것이다. 본다는 것은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보는 선은 외부에 있다. 종이 위의 선들과 관계된 어떤 과정이 뇌에서 일어난다. 이제 이 선들은 의미를 갖는다. 선들은 글을 쓰고 있는 저자의 생각을 가리키고, 이는 다시 읽고 있는 독자를 가리킨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는 이처럼 인간의 마음 과정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하고 있는 현상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명명했다. 지향성은 의미 개념과 마음 작동 전반의 중요한 특징이다.

생각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생각 '밖'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생각이 의미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의미의 세계는 물리적 세계로부터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순전히 물리적인 측면에서 의미의 세계란 무엇일까? 로벨리는 이에 대한 답을 정보와 진화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의미의 물리적 기원을 찾아서

클로드 섀넌의 정보 이론은 ‘정보’를 어떤 것이 취할 수 있는 가능한 상태의 수로 정의한다. USB 메모리가 저장하는 기가바이트는 메모리가 가질 수 있는 배열의 가짓수를 표현할 뿐, 그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즉, 정보의 양과 의미는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섀넌은 두 변수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를 측정하는 ‘상대적 정보’라는 개념도 제시했다. 양자 구조를 고려하면, 물리적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상대적 정보는 세계를 구성하는 상호작용들의 직접적인 귀결인 것이다. 상대적 정보는 의미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두 사물을 연결한다. 물리 세계는 이러한 상관관계로 가득하지만, 대부분의 상관관계는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다. 의미가 생기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생물학적 구조가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유용한 구조가 존재했기 때문에 생명체가 생존했다는 인과관계의 역전을 보여준다. 기능(눈, 입, 폐, 위)이 그 구조의 목적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현대 유전학은 변이와 자연선택이 생존에 유리한 구조를 지속시키는 메커니즘임을 입증했다. 이로써 '유용성'과 '관련성'이라는 개념은 물리적 실체를 획득한다.

변이와 자연선택은 생존 메커니즘을 훌륭히 설명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지닌 지향성을 온전히 해명하지 못한다. 의미는 단순한 생존의 도구를 넘어선 ‘무언가를 향하는’ 속성이며, 이는 진화론적 설명 그 이상의 다른 기반을 필요로 한다.

물리적 세계가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

여기에 DNA 분자가 정보를 암호화하여 수십억 년간 안정적으로 전달하듯, 생명체는 정보와 진화가 결합할 때 기적적인 현상을 만들어낸다.

섀넌의 정보 이론에서 말하는 단순한 물리적 상관관계(상대적 정보)는 우주 전반에 존재하지만, 생명체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과 번식에 직결되는 '유용한 상관관계'이다. 바위가 떨어질 때 이를 감지하고 피하는 것, 혹은 박테리아가 포도당 농도를 감지해 헤엄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모두 유기체 내부의 물리적 상태가 외부의 물리적 상태와 정확히 상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로벨리는 이를 '관련 정보'라고 정의하며, 이것이 생명 유지의 필수 조건임을 논증한다.

이러한 '관련 정보'는 순전히 물리적인 메커니즘이면서도, 동시에 외부 대상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브렌타노가 말한 지향성의 속성을 완벽히 충족한다. 박테리아가 포도당을 탐지하는 그 순간, 내부는 외부를 '지향'하며 여기서 '참' 또는 '정확함'이라는 가치가 발생한다. 이 지점이 의미 없는 물리적 세계와 의미로 충만한 마음의 세계를 잇는 첫 번째 연결 고리이다. 이제 여기에 뇌와, 의미를 갖는 과정인 뇌의 개념 조작 능력, 감정을 통합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 작동 과정과 관계 맺는 능력, 그리고 자기 자신, 언어, 사회, 규범 등과 관계 맺는 능력 등 인간을 특징 짓는 표현과 맥락 등을 추가하면, 인간은 다양하고 더 완전한 의미 개념에 다가가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복잡한 언어, 문화, 윤리적 의미들 역시 이 단순한 생물학적 상관관계라는 뿌리에서 시작하여 재귀적으로 발전한 결과물이다.

일단 물리적 개념과 의미 사이의 첫 번째 연결 고리가 발견되면 나머지는 회귀적으로 따라온다. 직접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 상관관계도 의미를 갖게 되고, 그런 식으로 회귀적으로 거듭 이어진다. 진화는 분명히 이 모든 것을 활용해왔다.

의미는 어떤 것을 다른 것과 연관시키고, 물리적 제약이 되며, 생물학적 역할을 한다. 그것은 자연의 한 요소를, 우리와 관련된 무언가의 신호로 만드는 것이다.

결국 의미와 지향성은 자연계 외부에 존재하는 신비한 무엇이 아니다. 양자역학이 밝혀냈듯 물리적 세계의 본질은 '상관관계의 네트워크'이며, 생물학적 의미는 이 보편적인 물리적 상관관계가 생존이라는 맥락에서 나타난 특수한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 활동이 가지는 의미의 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에는 단절이 아닌 연속성이 존재하며, 둘 다 본질적으로는 '관계'라는 하나의 원리로 설명된다. 의미는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상관관계 안에서 바라본 세계

정보는 고립된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관찰자를 포함한 관계의 산물이다. 가령 '당신'이 '하늘의 색'에 대한 정보를 가졌다는 사실은, 제3자인 '나'가 당신에게 묻고 하늘을 확인했을 때 두 결과가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보의 실체는 당신과 하늘, 그리고 나 사이를 잇는 물리적인 상관관계이다. 로벨리는 이를 "얽힘과 같은 3인조 댄스"로 묘사한다.

충분히 복잡한 시스템(인간, 동물, 정교한 기계) 내에서 이 물리적 상관관계는 질적인 도약을 이룬다. 정보는 단순히 상태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뒤따르는 상호작용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 우리는 눈을 감고 있어도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알며, 눈을 떴을 때 무엇을 보게 될지 미리 예견한다. 상대적 정보의 기초적 개념은 물리적 구조이고 그 위에 더 복잡한 정보 개념들이 놓이고 그것들이 이제 의미론적 값을 갖게 된다.

물질을 고정된 실체로 보는 '소박한 유물론'은 관찰자인 인간의 인식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반면, 물질을 '상호작용과 상관관계'로 재정의하면, 인간의 지식 또한 자연스럽게 물리적 세계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은, 의미 있는 정보를 생성하는 상호작용의 한 가지 결과이다. 그것은 '외부 세계와 내 기억 사이의 상관관계'이다. 내 기억 속의 뉴런 패턴과 외부의 하늘이 강력하게 얽혀 있기에, 우리는 이 물리적 연결을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정보'라는 단어는 물리적 상관관계와 정신적 의미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우리는 세계 밖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와 세계가 맺고 있는 그 상관관계의 안에서, 그 연결을 통해 비로소 세계를 알게 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곧 세계와의 얽힘 그 자체이다.

안쪽에서 바라본 세계

우주에는 무수한 물리적 변수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클로드 섀넌이 정의한 '정보'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두 변수 사이의 '물리적 상관관계'이다. 초기 우주에서 이 상관관계들은 아무런 의미 없는 소음에 불과했다. 그러나 생명이라는 현상이 등장하며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다윈의 자연선택 메커니즘은 무수한 상관관계 중에서 생존과 번식에 직결되는 '유용한 정보'만을 걸러냈다. 박테리아가 포도당의 농도를 감지해 이동 방향을 결정할 때, 그 내부의 생화학적 상태는 외부의 먹이를 정확히 가리킨다. 이때 물리적 상관관계는 비로소 '지향성'을 획득하며, '의미'라는 현상이 자연계에 최초로 등장한다.

뇌와 세계의 물리적 얽힘. 진화의 과정에서 신경계가 발달함에 따라, 이 단순한 의미들은 뇌 속에서 재귀적으로 결합하고 확장된다. 인간의 고차원적인 마음 활동 역시 이 생물학적 기초 위에 서 있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추상적인 허상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기억'과 '외부 세계' 사이에 형성된 강력한 물리적 얽힘이다.

우리의 뇌가 파란 하늘을 기억한다는 것은, 뇌의 뉴런 패턴이 외부의 하늘과 물리적으로 조율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정교한 조율 덕분에 우리는 눈을 감고도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알며, 미래의 상호작용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즉, 안다는 것은 세계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차머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여전히 "물리적 뇌 활동에서 어떻게 주관적 경험(의식)이 탄생하는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며 의식을 설명 불가능한 미스터리로 남겨두려 했다.

그는 뇌의 작동 원리를 밝히는 '쉬운 문제'와, 그에 수반되는 주관적 경험(감각질)을 설명하는 '어려운 문제'를 구분했다. 그는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의식만 없는 가상의 '좀비'를 통해, 물리적 설명에는 무언가 '추가적인 것'이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로벨리는 이것이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단언한다.

양자역학은 "세계에 대한 외부의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토머스 네이글은 과학이 3인칭 시점이라 주장했지만, 관계론적 관점에서 물리학은 항상 특정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기술하는 '1인칭 학문'이다. 우주 바깥에 서서 우주 전체를 조망하는 '전지적 시점'은 환상이다. 세계는 서로를 비추는 내부적인 관점들의 상호 반영이며, 우리는 그 상관관계의 그물망 '안쪽'에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의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낡은 형이상학적 개념을 버려야 한다.

'느끼는 주체로서의 나'를 독립된 실체로 상정하는 것은 뇌우(腦雨, 뇌 활동)를 설명하고도 제우스(주체)를 찾는 것과 같은 오류이다. 마흐의 말처럼 "구제받을 '나'는 없다." '나'는 실체가 아니라 복잡한 과정의 통합일 뿐이다.

물질을 단순한 질량 덩어리로 보는 18세기 기계론적 관점(잘못된 형이상학)은 양자역학에 의해 폐기되었다. 물질은 '과정과 사건, 관계들의 세계'이다. 이렇게 보면 마음의 작동과 물리적 현상 사이의 괴리는 사라지고, 둘 다 상호작용의 복잡한 구조에서 발생하는 자연현상으로 통합된다.

실재의 층위와 다원주의 세계는 쿼크와 글루온의 소용돌이부터 세포, 숲, 은하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실재의 층(Layers)'으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벨벳 같았던 숲이 가까이 가면 나뭇잎과 벌레로 분해되듯, 복잡성은 새로운 차원의 개념들을 창발시킨다. 기초 물리학이 모든 것의 기반일지라도, 여자 친구의 마음을 얻는 데 맥스웰 방정식이 소용없듯 각 층위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진다. 즉, 의식과 개념의 세계는 이 복잡한 실재의 층위 중 하나로서 자연 속에 존재한다.

관계적 관점에 서면 주체와 객체, 물질과 정신을 나누는 낡은 이원론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그것이 외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밝혀내고 나면, 더 이상 설명해야 할 '무언가'는 남아있지 않는다. 의식이란 별도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 몸과 환경 사이의 상관관계가 정교화된 반응일 뿐이다. 로벨리는 이를 "뉴런이 전달하는 신호에 포함된 관련 정보를 서로 비추는 거울 게임"이라고 정의하며, 이 과정이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이름이 바로 '의식'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뇌가 작동하는 세부 메커니즘(차머스의 '쉬운 문제')은 여전히 복잡하고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알려진 자연법칙 외에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연기 같은 비물질적 성분이나 새로운 법칙을 도입할 이유는 없다. "물질에서 정신이 나온다는 게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는 반론은 논리적 근거가 없는 막연한 '직관'에 불과하며, 이는 우리의 무지를 드러낼 뿐 자연의 한계를 증명하지 못한다.

심신 문제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문제이지만, 자연에게는 이미 해결된 문제이다. 우리가 모를 뿐이다.

자연은 이미 물질과 의식을 통합하여 존재하게 했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신비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겸허히 이해해 나가는 것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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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로벨리 물리학을 소개하는 동심헌(童心軒)의 기획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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