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흐에서 하이젠베르크로: 양자론의 맥락성
1925년 여름 헬골란트 섬에 은거해 있던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기묘한 행동을 설명할 법칙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중 결정적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그는 “전자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보자”고 결심한다. 즉, 전자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일을 포기하고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것, 전자가 방출하는 빛의 강도와 진동수만을 기술하자는 발상이었다. 오직 관찰 가능한 양에 근거해 세계를 기술하자는 생각, 이로써 행렬 역학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러한 하이젠베르크의 발상은 '신성한 땅'의 뜻을 가진 헬골란트의 공기가 아니었다. 그 밑바닥에는 '보는 것에만 의존하라'는 아인슈타인의 가르침, 그리고 그 아인슈타인에게 영향을 준 에른스트 마흐의 사상이 놓여 있었다. 마흐는 과학이 형이상학적 가정에서 벗어나 오직 관찰 가능한 것에 기초해야 한다고 보았다.
로벨리에 따르면, 20세기 물리학의 두 혁명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론은 모두 마흐의 영향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과학은 모든 형이상학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지식은 오로지 관찰 가능한 것에만 근거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논문 역시 “이 연구의 목적은 관찰 가능한 양들 사이의 관계에만 기초한 양자역학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19~20세기 사상의 큰 흐름은 세계가 정신 속에만 존재한다고 보는 관념론과, 세계가 물질 입자들로만 구성되었다고 여기는 유물론이었다. 당시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둘 중 하나에 대해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흐름이 강했다. 하지만 로벨리가 지적하듯, 레닌이 마흐와 논쟁을 벌이던 시기에 레닌은 이원론자였다. 그는 현상을 초월적 주체와 관련된 것으로만 이해하려 했고, 현상을 자연의 다른 부분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다.
반면 마흐는 세계를 정신과 물질로 나누지 않았다. 그는 자연을 복잡다단한 현상의 집합체로 보았다. 대상을 실체로 보지 말고, 현상들의 매듭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은 자연의 현상을 조직화하는 한에서만 어떤 것을 실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공간 속으로 들어가 전자의 궤도를 벗겨내고 전자가 발현되는 측면에서만 전자를 해석했다.
로벨리에 따르면 바로 이 지점에서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의 가능성도 열린다. 즉,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되는 요소는 각 물리계의 절대적 속성이 아니라, 물리계들이 서로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세계의 현상은 관념론은 물론 유물론 중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상호의존적 방식으로 나타난다.
마흐가 제시한 관점 덕분에 하이젠베르크는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것은 '자연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편견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 자연의 상상력은 우리보다 더 자유롭다는 것, 그래서 세계에게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 귀를 기울이고,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세계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현상을 명확하게 기술하려면 그 현상이 발현되는 상호작용에 관여하는 모든 대상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닐스 보어의 직관은 분명하게 다가온다. 현상이란 자연계의 한 부분이 자연계의 다른 부분에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우리는 대상의 속성을 그 속성이 나타나기 위해 상호작용하는 상대인 '대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대상의 모든 속성(변수)은 궁극적으로 다른 대상과 관련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맥락성(contextuality)이라는 양자 물리학의 핵심 기술적 개념이다. 즉, 사물은 언제나 맥락 속에 존재한다.
고립된 대상은 어떤 특정한 상태도 가질 수 없다. 모든 것은 언제나 다른 대상에 상대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계가 고정된 속성을 지닌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오랜 관념을 넘어, 모든 것을 관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가르주나
관계적 사고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생물학에서 생명 시스템의 특성은 다른 생명체들에 의해 형성되는 환경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화학에서 원소의 속성이란 다른 원소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다. 경제학에서는 경제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리학에서 개인의 성격은 관계적 맥락 속에서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들과 그 밖의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사물을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실재의 토대로 간주되는 '실체' 개념에 대해 거듭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분석철학에서 구조적 실재론은 관계가 대상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소피스트』에서 플라톤은 시간을 초월한 이데아도 현상적 실재와 관련하여 대화의 중심 인물인 '엘레아에서 온 손님'의 입을 통해 실재를 완전히 관계적으로 정의 내린다.
이렇게 서양철학사에서도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이 어떻게든 거듭되어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서양철학은 현상의 실재론, 혹은 실재론적 경험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서양철학은 세계를 독립된 요소들로 나눈 뒤, 그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는지를 함수나 규칙으로 설명하려 했다. 즉, 실체가 먼저 존재하고 관계는 그 실체들 사이에 나중에 덧붙는 것으로 여겨졌다. 로벨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요소와 함수의 형이상학’1)이라고 부르며, 서양 사유가 끝내 관계 자체를 존재의 근거로 삼지 못한 한계가 여기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던 중 양자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로벨리의 지적 여행은 이제 동양철학으로 옮기게 된다. 그것은 나가르주나(Nāgārjuna)였다.
나가르주나의 핵심 논지는 다음곽 같다.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는 곧바로 양자역학과 공명을 일으킨다.
아무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나가르주나가 독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전문 용어는 '공(空, Śūnyatā, 순야타)'이다.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덕분에, 다른 것의 결과로서,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것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참된 본질이라고 할 궁극적이거나 신비로운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광대하고 서로 연결된 현상들의 집합일 뿐이며, 각각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다. 이리하여 주체와 의식에 대한 수백 년에 걸친 서양의 사변은 아침 햇살에 공기로 흩어지는 서리처럼 사라져버렸다.
나가르주나는 2가지 층위를 구별한다. 즉, 관점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관습적인 외관적 현실과, 궁극적인 실재의 구별이다. 그러나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의 본질은 '공(空)'이라는 것이다. 즉,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관습적인 일상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여러 층위와 측면을 지닌 복잡한 그대로 긍정한다. 그것은 연구되고, 탐구되고, 분석되고, 가장 기본적인 용어로 환원될 수도 있다.
다만 그것들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조건 속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조차도 그 자체로 자립적 실체는 아니다. 구조는 다른 것을 조직하기 위해 설계된 한에서만 존재한다. 나가르주나는 '그것들은 대상에 앞선 것도 아니고, 대상에 앞서지 않은 것도 아니며, 둘 다 아니고, 둘 다 아닌 것도 아닌 것'이라고 표현하며, 모든 구조가 근본적으로 비어 있음을 말한다.
환영(幻影)이라는 삼사라(samsāra)는 불교의 보편적 주제로 이를 깨달음으로써 해방과 지복인 니르바나(nirvāna)에 도달한다. 나가르주나에게 삼사라와 니르바나는 같은 것, 둘 다 자신의 존재가 비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가르주나에게 오직 공만이 실재가 아니다. 그에게 모든 관점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뿐 결코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다. 공조차도 본질이 비어 있는 것이며, 그것마저도 관습적인 것이다. 그 어떤 형이상학도 살아남지 못한다. 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로벨리는 말한다. 우리는 나가르주나에게 양자의 관계성을 생각할 수 있는 강력한 개념적 도구를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자립적인 본질이 없어도 상호의존성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은 오랜 시간에 걸쳐 물질, 분자, 원자, 장, 소립자 등 '궁극적 실체'를 추구해왔는데 양자장 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의 관계적 복잡성이라는 암초에 걸려 난파되었다.
나가르주나는 많은 철학들이 잘못된 출발점을 가정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설득력이 없게 되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는 실재와 그것의 복잡성과 이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인 토대를 찾겠다는 개념적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이로써 로벨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나가르주나로부터 세계의 일반적인 특성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상호의존성과 우연성의 세계이지,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라는 나가르주나의 핵심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이상 단순한 실체가 아니라 상호작용과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양자역학의 원리와 연결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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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로벨리 물리학을 소개하는 동심헌(童心軒)의 기획 시리즈입니다."
🔖 주(註)
1) 요소와 함수의 형이상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세계를 독립된 요소들(Elements) 또는 실체(Substances)로 나누어 파악한다. 여기서 '요소'는 그 자체로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실재를 의미한다. 로벨리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물질, 신, 정신, 원자와 허공, 플라톤적 형상, 선험적 인식 형식, 주체, 절대, 의식의 원초적 게기, 현상, 에너지, 경험, 감각, 언어, 검증 가능한 명제, 과학적 데이터, 반증 가능한 이론, 해석학적 순환, 구조 등을 이러한 요소의 예로 제시한다.
이 독립된 요소들 사이에 나중에 덧붙는 것으로서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가정한다. 관계는 실체 자체가 아니라, 실체들 사이의 배열 방식, 연결 규칙, 혹은 상호작용의 함수(규칙)로 여겨진다. 요소 A와 요소 B가 존재할 때, 이 둘을 연결하는 함수나 규칙이 그들의 관계를 설명한다.
실체(요소)가 관계보다 존재론적으로 먼저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즉, 세계는 먼저 독립적인 '무엇(what)'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무엇'들이 '어떻게(how)' 연결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로벨리는 이러한 형이상학이 서양 사유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서양 철학이 현상의 실재론 또는 실재론적 경험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핵심 원인으로 본다. 이는 관계 자체를 존재의 근거, 즉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실재로 삼지 못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로벨리는 지금까지 보았듯이 양자론과 같은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독립된 '요소'가 아니라 근본적인 '관계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 즉, 관계가 실체를 선행한다는 관점을 통해 전통적인 '요소와 함수의 형이상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벨리가 지적하는 '요소와 함수의 형이상학'은 서양 철학사에서 다음과 같은 주요 흐름과 연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데카르트, 로크 등에 이르기까지, 실체를 모든 변화와 관계의 배후에 있는 변하지 않는 궁극적 토대로 간주했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맥을 같이한다.
복잡한 대상을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단순한 부분(요소)으로 쪼개서 이해하려는 근대 과학과 철학의 경향(분석적 접근)과도 관련이 깊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로벨리의 지적은 관계적 존재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유의 흐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Google의 Gemini. (2025년). “요소와 함수의 형이상학”에 대한 답변. Google 대규모 언어 모델에 의한 생성 기록. 2025년 11월 28일 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