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아버지

소년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년 후 해방이 되었다. 이듬해 소년의 아버지는 토평에 사는 오씨와 결혼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가난했어도 열심히 살았다.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며 동생들을 참으로 아끼며 보살폈다. 봄이 되면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채를 ‘노물’(봄동 나물)로 먹었고 여름에 ‘유채지름’(기름)을 얻었다. 매해 4월이 되면 유채꽃은 소년의 아버지 마을을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여놓았다.
1948년 봄에도 어김없이 소년의 아버지 마을에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하지만 그해 유채꽃은 노랗지 않았다. 봄의 어느날, 소년의 아버지는 붉게 물들여진 유채꽃을 보았다.
붉게 물들여진 유채밭 사이로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일군의 무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쫓아가는 무리는,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짐승이었다. 칼과 총을 손에 들고 사람들을 쫓고 있었다. 쫓아오는 ‘짐승’들을 피해 마을 사람들은 도망갔고, 살기 위해 ‘고봤다’(숨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나무 숲에 ‘고봤다’가 불에 타 죽었고, 동굴에 숨었다가 연기에 질식해 죽었다. 잡혀가서 총살당해 정방폭포 아래로 떨어져 물고기 밥이 되었고, 학교 운동장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그렇게 해서 그해 제주도 전역의 유채꽃은 피에 젖은 채 시들어버렸다.
그럼에도 ‘짐승’의 우두머리 이승만은 여전히 피에 굶주려 있었다. 채워야할 빨갱이 숫자가 모자란 모양이었다. 중산간 마을의 한 집당 한 명이 빨갱이가 되어야만 했다.
소년의 아버지도 그중 한 명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개령으로 인해 해안마을로 피신갔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이 소식을 듣고 소년의 아버지의 고모가 달려갔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이미 10여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소년의 할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 할머니가 친정 집안을 위해 종손인 큰조카(소년의 아버지)를 살려야만 했다. 하지만 소년의 아버지가 풀려나면 가족 중 다른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 했다. 경찰은 소년의 둘째 아버지(소년의 아버지의 첫째 남동생)를 잡아갔다. 소년의 아버지는 풀려나고 소년의 둘째 아버지가 소위 ‘대살代殺’로 잡혀간 것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는 물론 종손이면서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소년의 아버지는 이 살기殺氣 가득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노보다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밧줄에 묶여 걸어가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자꾸만 뒤돌아보는 동생을 형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자기 대신 죽어야 하는 동생한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죽이지 못해 환장한 세상에 그런 말은 자기기만임을 소년의 아버지는 모르진 않을 터 오히려 동생이 형님을 위로해주었다. 두려움에 떠는 건 형이었다. 동생이 고개 숙인 형님을 향해 울면서 말했다. “어머니의 아들에서 이제 저는 없는 자식입니다. 기억하거나 슬퍼하면 죄가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형님, 이제 저를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족들이 삽니다.” 소년의 둘째 아버지는 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후 소년의 아버지는 슬픔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울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동생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그럼에도 기억할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그래서 헛묘(시신 없는 무덤)에 비석도 세울 수 없는 폭력의 세상에 소년의 아버지는 슬픔을 구성하는 마음의 회로가 없어진 것인지 모른다.
동생을 위해 소년의 아버지는 살아야 했기에 슬퍼할 수 없었다. 살아야만 동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었으면 뼈라도 찾아야 하므로 잠시 동생을 잊어야 한다. 그래서 전쟁이 나자 소년의 아버지는 ‘나는 당신네 편입니다’라고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원 입대했다. 전투 중 소년의 아버지는 목 뒷쪽에 총상을 입고 조기 전역했다. 그 증표로 소년의 아버지는 반공 참전용사의 칭호를 받으며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그날의 진실이 드러날까봐 여전히 죽은자들의 가족들에게 침묵을 강요했고 기억을 억압했다. 당시의 우두머리 이승만은 권력에서 쫓겨났으나 얼마뒤 일제시대 관동군 대위로 독립군을 때려잡던 ‘다까끼 마사오’라는 일본 군인이 한국 군인으로 변신하여 쿠테타로 권력을 잡고 이승만의 명성 못지않은 독재로 이름을 날리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어서 이제 진짜 봄이 오나 싶었는데 앞선 독재자들이 키운 군인 한 명이 이번에는 광주에서 또다시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권력을 쟁취, 그날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은 계속 입막음 당했다.
‘그날’ 이후 40년이 흘렀고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독재가 막을 내렸다. 그러자 ‘그날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이제 슬퍼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오래된 단층 사이로 억압된 기억들이 새어나왔다.
소년의 어머니는 “그때 ‘으싸부대’가 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갔다.”고 말했다. 총과 칼을 들고 ‘으싸! 으싸!해서 으싸부대라고 했다. 서귀포 지역 토벌대를 소년의 어머니는 ‘으싸부대’라고 했다. 당시 서귀포지역 토벌대장 서귀포의 강씨는 국가로부터 애국지사의 칭호를 받고 공짜로 아파트를 지급받아 아주 오래도록 살았다.
TV에도 그날의 기록들이 방영되어 일말의 진실이 드러났다. 소년의 아버지가 TV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과녁 옷을 입고 소나무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지근 거리에서 엎드려쏴 자세로 겨눈다. 이윽고 비틀려진 몸에 앞으로 튀어나온 상체, 턱이 들리고 고개가 젖혀졌다. 무릎이 오그라졌고 입이 벌어졌다. 화면이 바뀌자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가 나타났다. 무릎을 구부려 올린 사람의 유골, 삭은 천조각이 허리에 걸쳐진 유골, 작은 발뼈에 고무신이 신겨진 유골들이 밭고랑 같은 구덩이 속에 포개져 있었다.”
저기에 혹시 내 동생이 있지 않았을까. 소년의 아버지는 울음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이제는 울어도 되고 슬퍼해도 되고 말해도 됨에도 소년의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동생을 찾지 못해서. 동생을 찾고 등에 업어 춤추며 집에 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해 소년의 아버지는 가슴은 “답답”하고 “막 하고 싶은 말”과 슬픔이 40년전 가슴속 깊이 들어앉아 응어리진 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소년의 아버지는 동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무자・기축년 시국’에 벌어진 사건들을 종합해 보면 남들처럼 동생은 틀림없이 죽었을 것으로 소년의 아버지는 생각했다.
하여 이제 소년의 아버지는 죽은 동생의 뼈라도 찾아야 하고 동생이 원혼怨魂이 되어 구천을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되게 해야 했다. 동생의 서러운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은 동생하고 얘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동생은 죽었으므로 말을 할 수 없다. 매개자가 필요했다. 심방이다. 심방만이 죽은 동생의 말을 형에게 전달할 수 있고, 그래야 동생을 안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굿은 시공간의 벽을 관통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다. 이때 심방은 영혼의 심부름꾼으로 단지 영혼의 말을 전달, 눈물수건을 한 손에 들고 영혼의 울음 곧 ‘영게울림’을 들려주며, 죽은 영혼의 애통함과 무고함을 비호한다. ‘무자・기축년 시국’의 기억이 금지된 상황에서 가족들의 “답답한 가슴”과 “하고 싶은 말”을 심방의 입을 통해 “막” 토해냄으로써 생존자들의 고통을 치유한다.
“성님 무사 나안티 겅 헙디가, 나 아무 잘못 어수다, 아방 일찍 죽어불곡 우리 식구 어멍이엉만 살당보난, 성님 잡혀강 죽어불민 아방 어신 것도 서러운디 어멍이영 저 어린 동생들 어떵헐꺼꽈, 아이구 아이구, 우리 식구 살리려고 나가 죽으거 아니우꽈게!”
“성님, 이제 울어도 되곡 놈안티 하고 싶은 말 막 해도 됩니다. 나, 이제 호나도 어떵 안 허우다. 미안해 하지도 괴로워하지 안 해도 됩니다.”
동생의 “죽은 영혼의 통곡”이 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심방이 영게울림을 통해 동생의 말을 전할 때마다 형은 흐느끼다 결국 엎드려 통곡했다.

그날, 소년의 아버지는 동생이 잡혀 간 이후 처음으로 슬픔의 감정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고, “하고 싶은 말”을 “막” 토해 냈고, 40년 응어리를 뱉어냈다. 그러면서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이제라도 어디강 초자보카!” 그러자 소년의 어머니는 “죽여그네 바당에 댁껴부러신디, 배로 식껑 육지 어디에 강 묻어비어신디, 어떵 알앙 초지쿠콰, 시끄러운 소리 그만헙써!”
그렇다. 소년의 아버지 동생은 그날 공천포에서 잡혀 위미지서로 갔고, 다시 서귀포경찰서로 이송된 것까지만 확인되었다. 이후의 기록은 알 수 없다.소년의 아버지는 끝내 동생을 찾지 못했다.
동생과 헤어진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나갔다. 소년의 아버지는 2004년 음력 6월 17일에 눈을 감았다.이에 앞서 소년의 아버지는, 아버지(소년의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서 15살에 호주를 상속했음에도 잡혀간 동생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던 탓에 40년이 지난 후에야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동생”으로 호적에 올렸고 자신의 셋째 아들을 동생의 아들로 입적시켜 동생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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