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한라병원 80병동 813호에 있다. 아내가 다쳤기 때문이다. 아내는 어깨 골절로 입원했다. 어제 아침 출근길에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지며 팔을 잘못 짚어 어깨쪽이 먼저 땅에 닿는 바람에 어깨 상부가 세 조각으로 부러졌다. 수술을 해야만 한다는 정형외과 의사의 진단에 따라 입원한 것이다.아내는 3일 후에 수술을 받을 것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퇴원 때까지 지금 이 병실에서 지내야 한다.
813호 병실에는 아내 포함 6명의 환자가 있다. 환자 중 87세의 할머니가 있다. 중증 환자지만 아직 중환자실로 가지 않고 있었다. 무슨 사정은 있을 것이지만 그 할머니의 육체를 마지막으로 지켜줄 가족이 없는 것이 이유인 것 같았다.
지금 할머니 병상을 지켜주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다. 이곳 병원으로 실려오기 전 어쩌다 연결된 할머니가 살았던 동네 사람이다. “할머니는 혼자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오빠는 일본가서 살다가 오래전에 죽었고 여동생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아팠고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35세 때부터 홀로 요양원에 들어가 나라의 보조금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50년 넘게 혼자 살아왔고, 이제 몸을 가눌수 없게 되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그 동네 사람이 나한테 말했다.
다음날 오후, 813호 병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할머니의 병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와 간호사가 동시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위독한 것이다. 동네 사람이 가고 간병인이 왔다.
나는 해가 비추는 창문 쪽으로 가서 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봤다. 할머니 얼굴에 산소마스크가 씌워졌다. 할머니 몸은, 마치 이불에 말린 것처럼 병상 침대에 동그랗게 드러누워 있었다. 눈꺼풀은 잠겼고, 얼굴은 오랜 세월 고통으로 닳고 오그라들었다. 숨소리는 거칠었다. 그때마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입은 뒤틀렸다. 시각을 상실한 눈, 뜻 모를 신음소리, 비대칭의 얼굴, 무의미한 몸짓, 죽음보다 더한 외로움, 모두 몸서리치는 단말마의 고통이다. 할머니는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나는 의사의 긴장된 눈빛을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는 며칠, 길어야 보름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마치 그 의사와 텔레파시라도 주고 받은 것처럼, 나는 그 의사의 진단 결과를 마음으로 알아챘다.
늙어서 손상되고, 외로워서 파괴된 할머니의 육체는 이제 보편성으로서 추상적 죽음이 아니다. "개별성"으로서 구체적 현실이다. 늙음과 죽음은 자연현상이라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그런 운명의 질서도 끝내 "개별적"이다. 이 개별성은 개체 자신의 것, 곧 할머니와 그 가족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 현실’을 목도하고 기억할, 할머니를 지켜주고 애도할 가족이 없기 때문에 할머니의 죽음은 끝내 개별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애도’할 가족이 없는 할머니의 죽음은 개별적 사건이 되지 못하고 어느날 신문에 실린 ‘어느 독거노인의 죽음’처럼, 통계적•관념적 죽음이 될 것이다. 신체 없는 관념적 죽음은 기억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위로받을 수 없다. 할머니는 죽으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이다.
“사람은 늙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시간에 의해 모든 것이 해체되고 붕괴되는 과정인데, 이런 걸 고정시키는 힘이 바로 기억이며, 그 기억은 사랑하는 사람을 망각으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사람들은 쉽게 말을 하지만, 그 할머니를 기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아서도 쓸쓸하고, 죽어서도 쓸쓸하기 그지없는 외로운 죽음이다.
할머니는 이제 먼지가 된다. 어릴 때 돌아가신 그래서 기억조차 희미한 부모님을 만나러 할머니는 또 다시 외로운 먼길을 떠날 것이다. 46억 년 전, 기억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그 억겁의 시간, 우주를 떠돌던 그 먼지처럼.
할머니는 오후 늦게 병실을 나갔고, 저녁이 되자 해가 창문 서쪽으로 기울었다. 겨울 석양빛은 병실 창문의 짙은 녹색 블라인드를 투과하지 못했다. 병실이 어두워졌다.
이틀 후 아내는 수술을 받았다. 병실은 아내의 요청으로 1인실로 바꿨다. 붉은 석양빛이 아내가 입원한 병동의 반대쪽 별관 건물의 유리창을 비추었고 그 빛은 반사되어 아내가 입원한 병실로 꺾여 들어왔다. 아내의 얼굴이 연분홍빛으로 변했다. 꽃 핀 얼굴이었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하필이면 ‘입술’의 용도가 궁금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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