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의 시공간을 건너온 '육아일기' : 한라산 어리목에서 만난 큰오색딱따구리

한라산 어리목 숲에서 만난 큰오색딱따구리 관찰을 통해 18년 전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연의 번식과 육아, 그리고 인간 기억의 재구성 과정을 과학적 시선과 서정으로 풀어낸 생태 기록 에세이입니다.

[영상: 한라산 어리목에서 만난 큰오색딱따구리]

시간의 기억

인간의 뇌는 참으로 경이로운 저장 장치입니다. 18년이라는 시간의 지층 아래 잠들어 있던 특정 감각이 찰나의 시각적 자극만으로도 선명하게 복원되곤 하니까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 하나로 기억을 소환했듯, 내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독 선명하게 각인된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2008년 5월, 한 언론사의 소개로 인터넷 문고에서 만났던 김성호 교수의 저서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김성호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8.)입니다.

기억의 인출

당시 제가 접했던 이 책은 단순한 조류 관찰기를 넘어, 생존이라는 고귀함 앞에 선 모든 생명체의 보편적 분투를 기록하였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 부부가 둥지를 만들고 알을 낳고 먹이를 물어다 새끼를 키우고 마침내 어린 새들이 서툰 날갯짓으로 둥지를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든 장면을 관찰한 50일간의 기록입니다.

큰오색딱따구리 부부가 둥지를 만들고 새끼를 키워내는 일은 사람과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자연계에서 80% 이상의 조류가 둥지 단계에서 도태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바람과 포식자, 그리고 까마귀 같은 침입자까지, 그 모든 위협 속에서 새끼를 지키려는 부모의 노력은 눈물겨운 싸움입니다. 당시 큰오색딱따구리 부부의 모습은 마치 인간 세상에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책이 나올 당시 우리 작은 아이는 불과 만 7살이었습니다. 둘째 아이 앞에서 이 책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를 읽어주며 그 아름다운 부부의 사랑과 희생 앞에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다시 그 시공간

오늘(2026.3.4. 오후 2:10.) 한라산 어리목 등반 후 하산 중 18년 전의 바로 그 큰오색딱따구리를 봤습니다. 울창하고 건강한 숲의 지표인 이 텃새는 고목을 쪼아대고 있었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가 고목을 쪼는 소리는 초당 약 2회에 달하는 가공할 속도의 물리적 타격으로 숲의 정적을 깨뜨렸습니다. 그 결과물인 나무 부스러기들이 마치 빗줄기처럼 내 머리 위로 "투두둑—” 떨어집니다. 이 파편들은 둥지를 짓기위한 노동의 잔해이자 생명의 서사였습니다.

한참을 쪼으더니 지쳤는지 잠시 숨을 고릅니다. 그때 옆모습을 자세히 보았더니 배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는 암컷이었고 배속에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고목에 둥지를 만들어 거기에 알을 낳을 계획인 것 같았습니다.

조만간 암컷 큰오색딱따구리도 남편과 함께 둥지에 새 생명을 낳고 김성호 교수가 관찰한 큰오색딱따구리 부부처럼 한라산의 냉혹한 자연 질서 속에서 처절할 만큼 힘든 육아 과정을 거치겠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벌써부터 한 침입자가 큰오색딱따구리 부부의 사랑을 질투하는 모양입니다. 촬영을 마치고 다시 하산하려는 찰나 한라산의 무법자 까마귀가 나타나 “까악—” 하며 평화로운 숲에 파열음을 냅니다.

그렇다고 인간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무심합니다.

그럼에도 내려오는 무거운 발걸음 속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 부부야, 까마귀 몰래 어디 잘 ‘고바그네’ 새끼 낳아 잘 기르고 행복하렴!”(끝)

[추신: 관찰의 기록과 과학적 성찰]

글을 마치며 복기해 보니, 큰오색딱따구리의 산란 시기는 보통 4월에서 5월 사이로 알려져 있더군요! 오늘 제가 본 큰오색딱따구리의 부푼 배는 어쩌면 18년 전 읽었던 『육아일기』의 강렬한 잔상과, 새 생명을 향한 나의 주관적 염원이 만들어낸 '인지적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기억은 인출되는 순간 재구성되곤 합니다. 조류의 생태상 산란기 전의 암컷이 외형적으로 배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는 경우는 드물기에, 그 '부푼 배'는 산란에 필요한 고에너지 영양분(지방)을 복부에 비축한 상태이었거나 혹은 제 간절한 마음이 투영된 왜곡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목을 쪼며 보금자리를 마련하던 그 경쾌한 타격음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생명의 신호였습니다. 설령 배 속의 알이 제 착각이었다 할지라도, 곧 다가올 4월의 한라산 숲속에서 그들이 써 내려갈 실제 '육아일기'는 책 속의 기록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아름다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