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스노비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세계관

20세기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꼽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2)를 아는가? 이 소설은 프루스트가 1907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1922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무려 15년에 걸쳐 작업한 대작이다. 일부는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가 프루스트 사후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희영 교수(76,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2012년부터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그해 첫 권 출간을 시작으로 2022년에 마지막 권이 출간되며 10년에 걸친 번역 작업이 완결되었다. 총 13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집의 총 페이지는 5,784쪽에 이른다.

이 작품을 두고 흔히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라고 할 만큼 찬사는 끊이지 않는다. 이 “높은 찬사”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통해 그의 문학적 기법을 체험하고,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인 기억과 시간, 예술과 사랑, 질투와 사회적 욕망에 대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경험하라는 뜻일 텐데, 그러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무엇이냐?를 발견하는 것은 독자의 역량과 관점에 달려있을 것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이후 전개되는 글에서 나오는 인물 ‘그 누군가’의 삶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스노비즘snobisme이다.

‘스노비즘’이라는 표현은 이 소설의 1권 125페이지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번역가 김희영의 주석과 작품 해설에 따르면, “흔히 ‘속물근성’이라고 번역되는 스노비즘(snobisme)은 프루스트 소설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이 말은 원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 대학 출신이 아닌 다른 대학 출신의 낯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하는데, 보다 일반적으로는 명문가에서 유행하는 태도나 방식을 찬양하고 채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르그랑댕이나 베르뒤랭 부인(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이런 귀족 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의 모방 욕망을 재현하는 인물들로, 피에르 지마에 의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세계관은 곧 스노비즘, 또는 신화에 대한 욕망’이라고 정의된다.”(1권, 125페이지)

대혁명에 끝에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년)이 수립되고, 귀족들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모두 상실했으나 부르주아들은 이런 귀족들의 역사적 패배를 부인하고 귀족들의 사회적 명성이나 미학적 취향을 모방, 답습하려고 한다.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 계급에 대한 욕망을 ‘신화에의 욕망’이라고 하고, 실체가 없는 계급의 영속성을 열망하는 부르주아들의 모방 욕망을 스노비즘이라고 명명한다. 이 ‘속물’들은 포브르생제르맹에 편입되기를 열망하던 일련의 부르주아들을 가리킨다. (…) 하지만 이런 실체가 없는 계급에 대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환멸과 허무의 인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제6권, 510페이지)

작품의 주요 무대인 '살롱salon'은 이러한 스노비즘이 가장 노골적으로 발현되는 공간이다. 살롱은 “귀족들의 취향과 몸짓, 말투, 예술적인 소양을 끊임없이 모방하려는 부르주아의 어리석음과 귀족들의 오만함과 잔임함이 자리하는 곳”이다. 이곳은 “이해되지 않는 은어, 속어, 개인어 등 각각의 계층과 직업에 따라 고유한 화법이 난무하는 세계, 말이 곧 권력인 그런 치열한 투쟁의 공간이다.”(제2권, 413페이지)

작품에서 살롱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자신들의 지적 허영심을 채우고 사회적 명성을 얻으려는 신흥 부르주아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진정한 예술적 가치나 인간적 교류보다는, 상류층으로 편입하려는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스노비즘의 본질을 드러낸다.

프루스트는 스노비즘의 근저에는 깊은 열등감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의 가치를 외부의 인정, 즉 귀족과의 친분이나 특정 살롱의 일원이라는 사실에서 찾으려 애쓴다는 것을 발견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그토록 열망하는 귀족 사회는 이미 그 실체를 잃고 쇠락해가는 중이었지만, 작가는 이들을 모방하려는 부르주아들의 대화와 행동에 감춰진 허영심과 위선을 간파한 것이다.

결국 프루스트가 말하는 스노비즘은 실체 없는 대상을 향한 맹목적인 추종이자, 자기기만에 빠진 인간 군상의 “비극적 희극”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부인의 '스노비즘'적 해석

오래 전부터 '그' 부인은 예술 전시 기획사인 ‘000컨텐츠'를 운영하며 예술계에서 활동해왔다. 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오는 20세기 프랑스 사교계의 '살롱' 문화와 유사하다. 즉, 프루스트의 소설 속 베르뒤랭 부인이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자신의 살롱을 명성의 중심으로 만들려 했던 것처럼, 예술 후원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과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방식으로서 그녀의 ‘000컨텐츠’도 순수한 예술에 대한 열정보다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수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문적 성취나 경력의 진정성이 의문시된 사례는 그녀의 지위에 대한 정당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자신이 속하고자 하는 세계의 기준과 규범을 따르기보다, 그럴듯한 외양만 갖추고 타인을 기만하려는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 프루스트의 인물들이 귀족의 '흉내'를 내는 것에 집착하는 것처럼, 이러한 모방은 실제 가치보다 외양을 중시하는 태도로 해석된다.

그녀가 드러낸 스노비즘적 아이러니는, “깊은 열등감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인정받지 못할까 하는 불안, 혹은 ‘속물이 아닌 척’ 해야 한다는 불안이 오히려 더 강박적인 과시를 낳았다. 그녀는 이 불안을 없애기 위해 권력과 결합한다.

그녀는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그것을 물질적 기호로 과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고가의 선물을 수수하였고, 권한 없이 국가 사업에 관여한 의혹 등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프루스트가 묘사한 스노비즘의 핵심인 ‘물적 욕망’ 이외에는 설명할 단어가 없다. 즉, 권력은 부를 끌어들이는 자석이 되고, 부는 다시 권력을 정당화하는 순환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 타인과 구별되려는 욕망의 발현으로 밖에 해석될 수 없으며, 프루스트가 묘사한 살롱에 드나드는 부르주아들의 허영심과 위선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특정 개인을 비난하거나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프루스트의 ‘스노비즘’ 개념을 하나의 분석 도구로 활용해 사회적 현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여전히 외부의 인정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 하고, 때로는 실체보다 외양을 중시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불안과 지위 경쟁의 산물로 해석될 수 있다.

결론

‘어느 부인의 사례’를 둘러싼 논란을 프루스트의 '스노비즘'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하는 것은,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속물적 욕망과 성공에 대한 강박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100년도 더 지난 소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주는 이유는, 신분상승을 향한 인간의 물적 욕망과 그 이면의 불안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제공한 '스노비즘'이라는 렌즈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욕망의 구조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복잡성을 이해하려면 단일한 렌즈보다 ‘만화경(萬華鏡)’적 시각이 필요하다. 만화경처럼 다층적이고 변화무쌍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스노비즘이 드러내는 인간 욕망의 다양한 패턴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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