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의 밤, 흙수저의 새벽

☀ 이 이야기는 실제 인물과 무관합니다 ☀

‘그’는 자신의 가게 길 건너 맞은편 분식집에서 혼자 김치찌개와 반주로 소주를 시켜 먹었다. 소주는 1병 반을 먹었고, 배가 고팠는지 김치찌개는 한 조각의 비개덩어리만 남긴 채 국물까지 거의 다 먹었다. 

식사를 마친 그는 식당을 나와 술집들이 즐비한 이중섭 거리를 지나 서귀포 일호광장을 한 바퀴 돌아 집으로 갔다. 차는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세탁소 '올래'에 주차시켰다. 그는 차에서 내려 돌담을 향해 급하게 노상방뇨! 소변을 보며 담배를 피웠고, 몸을 두 번 떨며 바지를 올려서 위법행위를 끝내자 곧바로 세탁소 올래를 빠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와 큰 길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무슨 상념이 그토록 깊은 것일까!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이내 발걸음을 큰 길쪽으로 되돌렸다. 그는 맨발에 ‘쓰레빠’ 그리고 반바지와 반소매의 얇은티 하나만 걸치고 택시를 탔다. 초가을의 차가운 밤공기는 그의 피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는 남문로터리에서 내렸다. 택시비는 ‘메다 요금’으로 1만 원이 나왔다. 5만원권 지폐 한 장으로 택시비를 계산하고, 택시운전사로부터 거스름돈 4만 원을 돌려받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언제나처럼 담배를 사려고 길을 건너 ‘강영희’패밀리마트로 들어갔다. 담배를 사고 있는 그를 여주인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여주인은 일주일 째 하루도 빠짐없이 그 시간에 담배를 사고 있는 그의 정체가 의심스러운 듯 그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는 패밀리마트 여주인의 눈초리를 애써 무시한 채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좁은 골목길을 돌아 중앙로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초승달이 떠 있는 가을 밤하늘 아래 담배 연기는 밤거리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한 5분쯤 걸었을까. 그는 중앙성당 조금 못 미친 골목길 동쪽 모퉁이, 막걸리집 ‘장터’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왜 그가 그토록 세탁소 올래와 큰 길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망설였는지, 술집들이 즐비한 서귀포 일호광장을 한 바퀴 돌아 집으로 가던 이유를 나는 알았다. 그는 술이 ‘고팠’던 것이었다.

막걸리집 장터 앞에는 이미 술 한 잔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일군의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들 중, 아직 안정된 생활을 가질 수 없는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는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듯 상념 가득한 표정으로, 그러나 내일의 희망을 품고 둘은 손을 꼭 잡고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젊은 부부는 일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일이 끝나면 늘 여기서 만나 늦게까지 보육원에 맡겨놓은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가곤 한다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부부를 바라보고 있던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장터 앞에서 혼자 술 한 잔 걸치고 택시를 기다리던 50대 중반의 까까머리 남성이 나에게 말을 했다. 아마 그 까까머리 남성은 이곳 장터의 단골 손님인 모양이다. 부부의 저런 모습을 자주 보는 것을 보니.

그는 피던 담배를 발 아래 떨어뜨려 비벼 껐다. 그 순간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던 어느 중년 사내의 쩌렁쩌렁 울리는 분노의 목소리가 밤거리를 가르며 울려퍼졌다. 그 중년의 사내는 “에이, 이 씨발놈의 세상아!”라고 소리 를 지르며 길거리를 무단 횡단하고 맞은편 복권 판매소에서 로또복권 두 장을 사고 나왔다. 잠시 뒤,“양, 빨리 걸읍써. 낼 밭디 안 갈 꺼꽝!” 술 취한 사내의 아내로 보이는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단한 삶이 쥐어짜듯 토해낸 소리, 알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난 울림이었다. 밤하늘의 초승달마냥 처연하다. 부부는 표선면 세화리에서 감귤 농사를 한다고 했다. 아마 올해 감귤 농사가 잘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한반도 수백 년 역사 속 고름처럼 곪아온 소작료, 그 소작료가 고스란히 오늘날의 농가부채1)로 이어진 채 그 굴레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1/10⁸⁰ 확률2)에 기대는 농민의 마음이 안타깝다.

그가 막걸리집 장터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데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 군사독재 시대 때나 들었던 노래, 어느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노년의 구슬픈 목소리였다. 그러나 노래가 길어질수록 목소리는 오히려 더 결의에 찬 독립군의 전진가처럼 들렸다. 이어서 “찬바람 따라 날아간 귀여운 파랑새/ 언제까지 오려나 내 사랑 파랑새/...보고파라 보고파라 내사랑 파랑새...”하는 노래도 불렀다. 아마 79년 제3 회 MBC대학가요제 입상곡 ‘파랑새’라는 노래인 것 같았다. 60대의 노년은 계단에 앉아 그 노래를 반복해서 울먹이며 부르다 마침내 고개를 무릎 밑으로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코를 “팽”하고 풀더니 이내 길바닥 누워버렸다. 술에 취해 뻗어버린 것이다. 그때 마침, 손님의 심부름으로 담배를 사고 가게로 들어가던 막걸리집 장터 여주인은 “그는 80년대 대학교를 다녔다고 하네요.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심취해, 사회주의로의 이행만이 이 땅이 살길임을 주장하며, 시대를 광정(匡正)하려 했답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두터운 벽 앞에서 끝내 좌절했고, 스스로의 모순에도 빠져 결국 실패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애초에 너무 무모한 싸움이었죠. 지금은 어느 고물수집 회사에서 내일이 없는 일일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지요.”라고 나에게 말했다.
중소도시의 깊은 상념은 술을 먹고 싶었던 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시의 찬란한 밤거리는 역설적이게도 비정규직한겨레으로 살아가는 젊은 부부, 여전히 빚에 시달리며 농산물 가격 인상 투쟁을 벌여야 하는 감귤 농사꾼3), 그리고 실패한 386세대 운동가4)의 고달픈 삶만 비춰 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60대의 노년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막걸리집 장터로 들어갔다. 그는 빈자리 의자에 앉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둘러 보고 아는 사람이 보이질 않자, 가게주인을 향해 “여기 빙대떡에, 아, 막거리 혼 팽 주쉐용, 콜!”하고 외쳤다. 술 달라는 얘기였지만 발음이 새고 있었다. 그는 남문로터리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사이 가게 인근 식당에서 먹은 술이 그의 정신과 감각을 조금씩 마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게슴츠레한 눈에 혀는 벌써부터 ‘뒈와-지고(비비 꾀다)' 있었다. 가게주인은 그를 염려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시간은 자시(子時, 11-1시)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술 몇 잔 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혼자는 재미가 없었는지, 상념 가득한 중소도시의 밤에 그를 보조할 그래서 말 상대가 되어줄 친구들을 찾으러 옆 건물의 2층 당구장으로 올라갔다. 2층 당구장에는 여느 때처럼 문수, 동하, 상훈, 종훈이가 당구를 치고 있었다. 한모섭은 ‘겜돌이’를 하면서 북경반점에서 배달된 짜장면과 뻬갈을 먹고 있었다. 한모섭도 술에 취해, 이상하게도 아까 그 60대 노년과 똑같은 ‘파랑새’라는 노래를 ‘솔솔’ 부르고 있었다. 술 친구들을 찾았으니 그 기쁨이야 오죽하랴! 엷게 미소짓던 그의 입이 가로 세로 각각 5cm 씩 더 찢어졌다. 기분이 찢어진 그는 “어이, 친구들 이따가 밑으로 내려들 오세용, 콜”하며 그는 다시 막걸리집 장터로 내려갔다.

그러나 몇 십 분이 흘렀어도 당구장의 친구들은 내려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막걸리집 장터로 가기 싫은 게 아니라 당구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당구 실력이 제일 하수인 상훈이가 이길 때까지 당구를 쳐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내일 새벽이 되어야 게임이 끝날지 모른다. 그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계속해서 술을 들이켰다. 그럴수록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갔다. 1시간 쯤 지나자 결국 그는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그는 가게주인이 “이제 집에 갑써”라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나가면서 가게주인 아줌마를 향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대각선을 그었다. 그는 일주일 째 이 가게에서 외상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외상값은 그의 절친인 문수가 며칠 있다가 와서 갚을 것이다. 문수는 참 좋은 놈이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가게주인 아줌마의 예쁜손이 그의 손을 잡고 도와주었다. 그 문에 ‘동깁써’(당기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여 있었음에도 그는 ‘밉써’(미세요)로 알고 계속해서 밖으로만 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시(子時)가 지나고 축시(丑時; 1시-3시)가 되면서 그에게 모든 사물은 거꾸로 보이고 있었다.

그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막걸리집 장터를 나왔다. 가게주인 아줌마가 택시를 잡아주자 그는 자신의 몸을 고꾸라지듯 무의식적으로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걸어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까 그 막걸리집 장터 앞에서 서성거리던 일군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 모두는 ‘헬조선’에서 ‘흙수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상념 가득한 중소도시의 밤에 술이 아니면 그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고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산다는 것, 왜 이렇게 외로운 것인가!

아침이 되면, 그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어느 해장국집에서 해장술과 함께 아침을 먹고 남원리에 있는 안경점 문을 열 것이다. 그는 남원안경 사장5) 이다. 어젯밤 상념에 젖은 표정의 젊은 부부는 아기를 보육원에 맡겨놓고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각자 일터로 향할 것이다. 표선면 세화리에서 감귤 농사를 한다는 성난 농부 ‘두가시’(부부)는 ‘미깡 파치(비상품)’를 콘테나에 담아 차에 실어 농협 선과장으로 가서 또 다시 농협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술 취해 길바닥에 자빠진 60대의 노년은 노동의 즐거움도 빼앗긴 채 오늘도 고물수집 회사에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내맡길 것이다. 당구실력이 제일 하수인 상훈이는 과연 이겼을까? (이 글의 서사 구조는 이명원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 주(註)

1) 해방을 전후한 20 세기 한국 농촌의 구조적 부담은 형태만 바꾼 채 이어졌다. 일제 후기, 식민 당국은 미곡 공출과 가격제를 강화하며 소작료를 현물(쌀) 대신 현금으로 내도록 유도했다. 현금을 마련할 길이 없던 소작농은 고리 사채에 손을 댔고, 그때부터 ‘소작료=채무라는 고리가 형성됐다. 소작제도(小作制度)-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45년 해방 뒤 미군정은 「농지 임대차령(소작료 1/3 상한령)」을 공포했지만, 현금 납부 조항과 전후(戰後)인플레이션이 겹치면서 농민의 실질 부담은 오히려 늘었다. 소작료를 내려면 다시 사채나 품삯을 빌려야 했다. 국가기록원

근본적 전환은 1950년 농지개혁이었다. 국가는 3정보(약 9,000평) 초과 지주의 토지를 매수해 소작농에게 넘겨주되, 평년 수확량의 150%를 대금으로 책정하고 5 년 균분 상환(연 30 %씩)·연 6 % 이자를 물렸다. 지주에게는 ‘지가증권’, 농민에게는 ‘분배대금’이 남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나라기록포털

6·25 전쟁과 물가 폭등이 터지자 상환액의 실질 가치가 급격히 뛰었다.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농민들은 다시 사채와 농업은행 융자에 의존했다. 이렇게 해서 ‘소작료 부담’은 ‘분배대금 - 이자 부담’이라는 금융부채로 탈바꿈했다. JSTOR JSTOR

1950 년대 말 정부가 고리채 정리사업(1·2차)과 농협 통합(1961)을 추진했지만, 농촌의 고율 이자 구조를 근본적으로 풀지 못했다. 1960년대 초 농가당 부채액은 오히려 증가세로 돌아섰고, 이후 ‘농가부채’라는 이름으로 통계와 정책에 제도화되었다. 이코노텔링 한국농정신문

정리하면, 소작제는 법적으로 사라졌어도 채무 구조는 남았다. 일제 후기의 현금 소작료는 고리 사채에 의존하게 만들었고, 해방 직후는 인플레이션으로 부담이 가중되었다. 1950년 농지개혁에 따른 분배대금은 고스란히 부채(사채와 농협 채무)로 전가된 이 순환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농가부채’는 한국 농업의 만성적 굴레로 남게 되었다.

2)"1/10⁸⁰"은 우주 원자수의 1을 의미한다. 실제 로또복권 당첨 확률은 약 0.0000123%이다.한국일보

3) 제주도 농업소득은 최근 10년 간 - 2015년 7,713천 원에서 2024년 18,663천 원으로 142%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통계상의 수치일 뿐, 실제 농가의 사정이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2024년 기준 농업소득만으로는 가계지출 48,041천 원을 충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현실에서는 농외소득(농업 외 근로, 부업, 임대소득, 농산물 가공 및 판매 등) 20,147천 원과, 이전소득(직불금·보조금 등 정부 지원금) 15,965천 원이 농가소득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를 합치면, 농가 총소득 60,247천 원 중 약 60% 이상이 비농작물 수입과 공공 지원에 의존하는 구조다. 이는 농업 자체의 수익 구조가 자립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통계청 농가소득 현황

게다가 제주 농가의 부채 규모는 전국 평균 45,015천 원에 비해 2배 가까운 83,670천 원으로 매우 높다. 더 큰 문제는, 이 부채가 줄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2024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부채 규모가 줄었다. 이는 예외적으로 2024년산 감귤 가격이 유래 없이 좋았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부채 규모는 여전히 높다. 소득이 증가하면 부채가 줄어야 마땅하지만, 통계는 오히려 부채도 소득과 비슷한 비율로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부채의 긴 그림자는 촤근 10년 간 조금도 짧아지지 않고 있음을 통계는 보여주고 있다.

결국, 농업 총수입이 증가했다 해도, 대부분 이자 비용에만 충당하고 있다. 이는 농업경영비 중 농약, 비료, 일반 자재 구입 비용이 대부분 외상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사실상 이자만 납부하는 방식의 회전식 한도대출(마이너스 대출)로 부채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감귤 농가의 시설 투자와 자식들을 위한 농가주택 신축 비용이 부채비율을 더욱 높이고 있다. 부채는 당대에 갚지 못하면 후대에 물려주어야할 법적 승계 사항이다.

이처럼 농업소득, 농외소득, 이전소득을 합쳐야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은 지금의 농업이 자립적 경제 기반이 아니라 보조적 생계 수단밖에 안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이면에는 고정화된 부채, 소득구조의 왜곡, 농산물 가격 불안정이 깔려 있다. 특히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에 농산물을 조절 수단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농민의 가격 결정권을 약화시키고, 시장의 불안정성을 농가에 전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론적으로, 통계는 “남는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 농가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4)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이 세월을 지나 386 세대로 자리 잡은 뒤, 그 안에서는 두 갈래의 삶이 분명히 엇갈렸다.

첫 번째 갈래는 정치‧경제‧시민사회 상층부를 빠르게 점유한 소수다. "2004년 총선에서 40대가 된 ‘386 세대’는 526명의 입후보자를 내 전체 후보의 40%에 근접했고, 2016년에는 역대 최대인 48%를 점하면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2017년 국내 100대 기업 이사진에서 386 세대의 점유율은 70%를 넘어섰다. 이전 세대에서 50대의 이사진 점유율 60%라는 황금률이 깨졌다. 시민사회 조직과 대기업 노조 간부 점유율, 상층 노동시장 점유율, 최장의 근속연수, 최고 수준의 임금과 소득점유율, 꺾일 줄 모르는 최고의 소득상승률, 세대 간 최고의 소득 격차 등 386 세대가 다른 세대를 압도하는 타이틀은 여럿이다."(문화일보,2024.1.31.)문화일보

두 번째 갈래는 경쟁에서 밀려난 지방대 다수의 운동권 출신이다. 박소진("386세대를 둘러싼 연구쟁점과 세대연구를 위한 제언", 사회사상과 문화, 26(1),2023, 169‑208)은 두 차례 경제위기를 겪는 동안 “다수는 노동자나 영세 자영업자로 남아 있다”고 지적하며, ‘파워 엘리트 386’ 뒤에 가려진 비정규직·영세 386 집단의 존재를 드러낸다. KISS

오찬호("소외된 세대의 복원:386세대 ‘內’에 대한 세대사회학적 접근", 사회과학연구, 36(2),2023, 113‑137)는 이들을 “생계형 386세대”라 부르면서, 농장 품삯·일용노동에 매달리는 하층 코호트를 실증적으로 묘사한다. RISS

신민선("노동운동 출신 지역활동가의 정체성 이행 과정에 나타난 학습 활동 연구"(박사학위논문),서울대학교 대학원, 2018.)의 박사논문은 학생운동가가 “지식인을 버리고 노동자 계층으로 하강”해 지역 생협·농촌 활동으로 삶의 무대를 옮기는 과정을 추적하며, 운동권에서 시작된 지역 영세 노동·자영업 경로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서울대학교 학술 저장소 S-Space

정리하면, 386 세대는 민주화 이후 ‘상층 엘리트’와 ‘생계형 하위 집단’으로 뚜렷이 분화했다. 엘리트 소수는 정치·기업·노조 지도부를 장악해 세대권력을 확장했지만, 다수의 운동권 동료들은 중소도시의 판매상·영세 자영업·농업 노동자로 흩어지며 생계를 이어간다. 같은 세대 안에서 권력과 빈곤이 공존한다는 점이 한국 사회 불평등의 또다른 이면이다. 여기에 나오는 소위 '60대의 노년'은 두 번째 갈래에 해당한다.

5) 지방 자영업자의 폐업률이 높다는 것은 굳이 출처를 제시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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