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이옥남 할머니는 올해 나이 아흔일곱이다. 1922년 강원도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송천 마을에 산다. 열일곱에 시집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아들 둘, 딸 셋을 낳았다.

아홉 살에 호미를 들어 아흔일곱이 된 지금까지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연 속에서 언제나 농사일과 함께 세월을 보낸다. “복숭아 꽃 피면 호박씨 심고, 꿩이 새끼 칠 때 콩 심고, 뻐꾸기 울기 전에 깨씨 뿌리고, 산벚꽃 필 때 나물하고, 매미 울 때는 김매느라 바쁘고, 깨꽃 떨어질 때 버섯 딴다. 정성 들여 가꾸고 정성 들여 거둔다. 그저 잠만 깨면 밭에 가서 일을 하고 이 나이 되도록 이때까지 살아왔다.”

어려서는 그렇게 글씨를 쓰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못배우게 했다. “그것이 원이 되어 부엌에서 불 때면서 부주깽이로 재 긁어내서 재 위에 ‘가’자 쓰고 ‘나’자 써보고 배웠다. 아들 군대 갔을 때 편지가 오면 누구한테 편지 써달라고 하기 싫어서 그냥 되는대로 내 손으로 글씨를 써서 화답을 하면서 조금씩 글씨를 써왔다. 글씨 쓴다고 남편한테 별 말을 다 듣고 살아왔다. 남편이 죽고 혼자 살다보니 적적해서 글씨가 좀 나아질까 싶어 도라지 캐서 판 돈으로 공책을 사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일기가 되어 이제까지 왔다. 그때가 1987년이니, 꼬박 30년 넘게 일기를 쓴 것이다. 일기장은 교사인 손자가 소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자의반 타의반, 그 일기장을 엮어서 이번에 책을 냈다.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양철북, 2018)

책은 1987년부터 최근까지 쓴 일기 151편을 엮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 편집하여 실었다. 계절과 자연의 변화에 따라 농사를 짓고, 소박한 일상을 얘기하고, 자식과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가득하다. 꾸미지 않은 언중(言衆)의 입말로 한자한자 적어나간 삶의 온전한 기록들이다. “낮에는 뻐꾹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을 하고 밤에는 ‘솟종새(소쩍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썼다.”고 했다.

온 생명체를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 사람처럼 식물과 짐승의 고통도 공유하고, 사람도 자연처럼 깨끗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듯, 일기는 자연주의자로서 할머니의 삶의 철학이 오롯이 관통된다.

“둥근 콩 속에서 이파리가 나오고 또 그 속에서 속잎이 나오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 내가 뽑는 풀도 똑같이 그러한 원리로 세상 밖으로 나올텐데 농사 때문에 뽑아 놓은 그 풀이 햇볕에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보니 죄 짓는 느낌이다.”( 2007년 6월 12일)

“앞마당에 백합꽃 봉우리가 생기더니 이십 일 정도 지나니까 꽃이 피었다. 문 열고 밖에 나가면 백합꽃 향이 너무 확 난다. 참 귀엽고 만져보고 싶다. 하얀 백합이 보기에도 깨끗하고 즐거워서 사람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2003년 6월 24일)

“소나무 가지에 앉은 뻐꾹새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힘들게 운다. 그렇게 힘들게 우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고 짐승이고 사는 것이 다 저렇게 힘이 드는구나.”(2006년 5월 19일)

일기 중 할머니가 깨밭의 풀을 베고 잡초를 매는 장면이 꽤 인상 깊다. ‘일의 즐거움’에 대하여 말한다.

“한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깨밭을 가봤더니 풀은 크고 얼마나 잡초가 무성했는지 깨가 안 보인다. 깨 사이로 들어가니 풀과 깨가 꽉 에워싸서 바람 하나 없다. 아무리 부즈러니(부지런히) 매도 도저히 티가 안 나고, 아무리 빨리 매도 자리가 안 난다. 옷은 땀에 젖어 짜게 되고 이마에서는 땀이 둑뚝 떨어진다. 다 매고 나니 맘이 시원하다. 김매고 돌아보니 깨가 완연하게 좋아보였다.” (2007년 7월 31일)

이 일기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 2』(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p37~38)에서 주인공 레빈이 무아지경에 빠져들 정도로 온몸에 땀을 적시며 풀을 베는 장면이 연상된다. 자기 키보다 더 큰 풀을 베고 잡초를 매며 땀에 젖은 옷을 짜고 이마에서 땀을 흘리는 할머니의 모습과 닮았다. 자연과 호흡하며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며 깨밭의 무성한 풀과 잡초가 저절로 베어지고, 그래서 깨밭이 정확하고 정교하게 직조되어 가듯, 할머니의 생활은 늘 이렇다.

책 읽는 모습은 또 어떤가. 할머니가 집에 오면 첫 번째로 살펴보는 일은 매달 받아보는 ‘한국글쓰기 교육연구회 회보’가 우편함에 들어 있느냐이다. 거기서 국어학자 이오덕 선생의 시와,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몽실언니』을 읽으며 시간 가는 줄 몰라하며, 어디 그런 책 있으면 읽고 또 읽고 싶은 ‘지적 욕망’을 드러내지만, “맘 같아서는 대번 다 읽고 싶은 데 밤에는 글씨가 작아서 눈 어두어서 못 일고 겨우 낮에만 읽으니 답답하다”는 겪한 아쉬움만 토해낸다.

평생 업으로 여겨왔던 밭 일과, 자연에 대한 할머니의 글은 얌전한 듯 하지만 동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상에 대한 세세한 묘사에 이르게 되면 보통의 ‘성깔’ 있거나 욕쟁이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특히 세빠또 할매에 대한 할머니의 증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다. 세빠또 할매가 심심하면 찾아와서 몇 시간씩 듣기 싫은 말만 늘어놓으면, “너무너무 지루해서 죽을 뻔 했다,”든가 “그 웬수 때문에 하루를 그냥 보낸 것이 분하고, 언제 봐도 반갑지 않은 얼굴”이라며 “곁에 있기도 싫다” 고 한다.

일기에는 이런 글도 있다. 동네 방오달이라는 사람이 할머니가 다니는 길을 측량했는데, 그 측량비를 내라고 하길래 너무 비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분하기도 하고 업신여기는 것도 같고 해서 누워있는데, 하필이면 또 그때 세빠또 할매가 와서 또 듣기 싫은 말만 늘어놓다 간다. 왜 나는 이렇게 복도 없는지. 그저 속 썩여주는 인간밖에 없구나. 그까짓 방오달이 같은 인간 새끼한테 서름받는 생각하니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작에 저 세상 갔으면 그런 드러운 꼴 안 봤을 텐데 생각할수록 분하다. 자식들이 먼 데 사니깐 별 개새끼가 다 날 만만하게 보고 꼴값을 하네.” 라며 자신의 분한 마음을 일기에 쓰고, 가을에 도토리를 주워서 “돌멩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려서 깨다가 자꾸 뛰나가자,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는 대목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러다가 자식과 가족 얘기를 할라치면, 한없이 외롭고 슬퍼지고 손자를 볼 때면 기쁘기도 하다.

“그저 빛다른 음식을 봐도 자식 생각 좋은 옷을 봐도 자식 생각, 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왜 그리 못 잊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늘 자나깨나 그놈의 자식 생각. 이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낮에 일하다가 밤에 자다가 살며시 숨졌으면 하고 바란다.”(2008년 7월 24일)

“추석 오기전 시아버님 산소에 가서 벌초를 하였다. 술 한 잔 부어놓고 절했다. 마음이 편했다.”(2004년 9월 10일)

“손자 내외가 와서 용돈 오만 원을 주고 갔다. 저 산 넘어 해질 무렵네는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데 오늘은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인 것 같구나.”(1997년 2월 5일)

“서울 동생이 숨이 차서 다니지도 못하고 밥을 못 먹는다고 한다. 동생은 여섯 살 때 엄마를 여의었다. 그때 나는 아홉살이고 오빠는 열두 살, 남동생은 세 살이었다. 우리 사남매는 모두 서모(庶母) 손에서 컸다. 세 살 때 엄마 잃은 남동생은 군대 가서 죽었다. 이제 남은 삼남매 중 동생이 암만해도 먼저 걸 것 같다. 밤이 되면 잠도 오지 않고 늘 맘이 허전하고 섭섭한 생각뿐이다. 밖에 나가면 눈 오고 방에 들어오면 캄캄하고 이 심정 뭣에다 비하랴.”(2003년 2월11일)

“밖에는 휘영청 달이 밝다. 애들이 보고 싶다.” “고요한 밤에 풀벌레 우는 소리만 쟁쟁하게 나는구나.”

대구지하철 화재사고에 십만 원의 성금을 내고, 큰 불이 난 읍에 장롱 속에 넣어뒀던 의복들을 보내는 등 할머니는 결코 혼자만의 삶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주의자 답게 책 서문에는 기후변화에 대한 통찰도 엿보인다. “전에는 뻐꾸기 울기 전에 깨씨를 뿌려야 하는데 이제는 날씨가 바뀌어서 뻐꾸기 울고도 한참 더 있다가 깨씨를 뿌리고, 콩도 전에는 소만에 심었는데, 지금은 하지가 다 되어서 심고, 모든 것이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책으로 엮은 할머니의 일기는 오래된 풍경화처럼, 오래된 것이 늘 그렇듯, 아름답다. 할머니는 스스로 글씨를 배워 일기를 쓰다보니 자연과 사람과, 사회를 보는 눈이 남다른 것 같다. 사람과 자연과, 가족과 사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넓고도 깊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이다.

나는, 이 책을 할머니가 살아온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할애한 것처럼, “더 부드럽게, 더 천천히 마음속으로 읽고, 그래서 가장 간단한 문장조차도 감동적인 어조로 말을 걸어 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읽었는지, 약간을 그랬을지 모르지만, 전적으로는 자신할 수 없다. (끝)



* 2018년 9월 내가 가입한 네이버 '밴드'에 올린 글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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