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서북능선 산행기

내가 서북능선으로 간 까닭은?

많은 사람들은 서북능선에서 바라보는 설악의 풍경은 가히 천하일품이다라고 말한다. 수십 개의 봉우리들과 일체를 이루며 우뚝 솟은 기암괴석들과 운해, 그 장대함에 몸서리치며 산하를 만끽하는 순간, 이루말할 수 없는 희열과 자신의 고귀한 존재감을 새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23년 11월, 설악의 만추에 중년의 쓸쓸함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지나온 삶이 아쉽고,그 시절이 그립다. 쓸쓸함, 아쉬움, 그리움 모두가 황혼의 서글픔이다.

황혼의 서글픔이라!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그 작아진 뒷모습을, 힘들지만 스스로 너그럽게 쓰다듬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산길을 걸으며 마음속으로.

하지만 산길은 수십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 하고 지척에 보이는 봉우리도 쉬 닿지 못하고 가야할 봉우리는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자신을 쓰다듬기전 고통으로 쓰러질 판이다. 그러면서 뾰족한 바위길, 수킬로미터에 이르는 너덜길에 이르게 되면, 너그럽기는커녕 욕부터 나온다. “씨발!” 오잉, 자연 앞에 이 무슨 욕인가. 참고 참아야 하고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하거늘, “설악은 태초부터 날이 서 있는 산세인걸 어떻하란 말인가.” 험한 산길은 내가 살아온 삶이 그러하였듯이 천천히 가라는 산의 뜻, 익숙함에 길들여진 속도 대신 산이 정해준 속도를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멀리 있는 것만 같았던 풍경과 어느새 나란히 발 맞추게 되고 저기 저 멀리 봉우리와 만나게 될 터, 내 나이 60이 되고서도 성인이 되지 못한 까닭이다.

이러한 산길을 2023년 11월 10일 새벽 4시 장수대에서 출발 6시 대승령 도착,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북능선을 타고 1408봉—>귀때기청봉—>한계령 삼거리를 지나 마지막 끝청에 도착, 다시 중청과 대청에 이르는 17km를 걸을 예정이었으나, 60평생 살아오면서 겸손하지 못했고 때때로 우쭐하거나 거만했으니 장장 13시간을 걸어왔음에도, 자연은 이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결코 내게 다가와 주지 않았다. 트레킹 폴로 지친 몸을 지탱하며 걸었지만 끝내 마지막 봉우리를 응시하지 못한 채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후 5시경 왕복 1.2km를 남기고 대청봉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해가 넘어가는 오후 5시 30분에 반죽음 상태로 소청대피소에 도착, 대청봉은 다시 내년으로 기약, 별을 보며 저녁을 먹고 다음날 아침 백담사로 하산, 하산중 봉정암에 들러, 부처님께 일곱 번 절하며 겸손! 겸손! 겸손 또 겸손... 수십 번 다짐하였다.(끝)

P.S.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서북능선은 절대 가지 마라. 나의 부탁이다. 책임 못진다.

*2023년 11월 내가 가입한 네이버 밴드에 올린 글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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