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규범, 안나 카레리나 법칙

언젠가 나는 소설가 박범신의 경향신문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이혼과 글쓰기의 상상력에 관한 글이었다. 자신의 감수성이 없어질까 두려워한 작가는 하마터면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말할 뻔 했던 자신의 일화를 소개한 글이다.
어느 날 작가 박범신에게 ‘안온한 일상’이 찾아왔다. 교수직를 퇴임하고 서재에서 한적하게 살다보니 부족함을 못 느끼는 것이다. 늘 불안하고 위태롭다고 느껴야할 그래서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할 작가가 일상의 안온함이라니! 그가 느끼는 것은 메말라가는 감수성에 대한 공포감일터, 이제 어찌해야 하나!
그때, 자신의 안온한 일상에 대한 불안을 해소할 하나의 처방, 작가 박범신이 생각한 것은 아내와의 이혼이었다. 감수성을 복원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밥과 빨래를 하며 한평생 바친 아내인 한 여자와 ‘늘그막에 이혼한다면 그것이 불러올 고통스러운 파동은 일파만파로 번질 것이고 내 감수성은 썩을 일 없이 그 에너지로 계속 소설을 뜨겁게 쓸 수 있겠구나 싶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작가들에게 삶의 모든 것들은 심지어 죽음까지도 작품의 소재일 뿐이다. 그럴진대 ‘이혼’, 그것도 40년 부부 자신들의 황혼 이혼이라, 와우 멋쪄!!
그는 곧바로 잠자는 아내의 침실로 갔다. 아내를 깨우며 “우리 이혼해야겠어..” 라고 하려다 그는 그만 그전 같지 않은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순간 난데없이 콧날이 시큰해 졌다.’ 그들 부부의 40년 세월은 득과 실이 같지 않다. 아내인 여자가 남자인 남편보다 잃어버린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아내는 남편과 자식들만을 위해 살다가 그만 너무 늙어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남편이, 젊고 예쁜 여자라면 모를까, 그런 아내에게 이혼을 하자니! 인간이 할 짓이 도저히 못 된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멋지다! 고 느낄 때 되돌아서 생각하면 착각인 것이 태반이다. 그후 그는 혼자 충남 논산에 내려가 이혼이 아닌 따로 떨어져 살며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신의 감수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얘기 들었다.
한 때 이혼을 생각했었던, 나는 어떤가. 난 작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혼은 글쓰기를 위한 감수성과 상관없다. 나에게 이혼은 작가들처럼 단순한 이별 연습이 아니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리나』는 다음과 같은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이 문장에서 톨스토이가 말하려는 것은 가정이 행복해지려면 수많은 요소들이 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성적 매력을 느껴야 하고 돈, 자녀교육, 종교, 가례와 집안의 관습 따위의 친인척 관계 등등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에 필요한 이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긋난다면 그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성립하더라도 그 가정은 불행해 질 수밖에 없다. 소위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이다. 물론 이 법칙은 사랑이 전제되거나 매개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의 이혼 사건은 이 ‘법칙’에 적용받았다. 작가들처럼 이혼해서 폼 잡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가지가 아니라 많은 ‘요소’ 들에서 서로 맞지 않거나 합의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의 가정은 아이들에게나 우리 부부에게나 한 때 ‘불행’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우리 가족에게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덮쳐왔다. 세월호다.
세월호 사건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나라가 어떻고 안전한 사회란 무엇인가 등등의 사회적인 것들은 그렇다 치고 가족과 아이들을 지켜주지 않고서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은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소설가 박범신은, 작가라는 폼 잡는 일이 주업인 이유로, ‘부족함이 없고 안온한 일상 때문에 불안’하여 역시나 작가다운 순간적 상상력으로 아내와의 이혼을 생각하였지만, 대신에 나는, 부부관계가 파탄으로 치닫고 역시 ‘불안’한 날을 보낼 때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그로 인하여, 아이들과 아내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 세월호, 그 망할 놈의 패덕(悖德)의 시간 동안, 나는 가족의 소중함과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 없이 하루도 지탱할 수 없었다.
“매일 보도되는 끔찍한 참사의 소식에 두 딸이 있는 아빠로서, 숨을 쉴 수 없어 발버둥 치던 그 아이들의 섬뜩한 공포를 생각하면 그 순간순간 마다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고 몸이 무너집니다. 내 아이들은 어디 있나? 당신한테 있겠지! 큰아이가 메세지를 보내왔습니다, “아빠, 사랑한다”고. 감사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무사하구나. 정말 고마웠습니다. 왜 이렇게 아이들이 보고 싶은지, 밤늦게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방에 들어가 정말 무사한지 잠자는 두 딸을 보았습니다. 불 꺼진 방안에서도 예쁜 우리 딸이었습니다. 부엌에 들어가 물 한 모금을 눈물과 함께 힘겹게 목젖으로 넘깁니다. 그리고 들킬까봐 조심조심 조용히 바깥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굳이 당신이 아니라도 내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라도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라도 전화해서 “당신 아이들은 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다시 뜨거운 것이 콧속을 지나 목젖으로 흘러듭니다. 울지 않고서는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아침에 흘린 눈물은 저녁까지도 멈추질 않습니다.”
아이들이 있어야 하고 부부가 중심이 되는 가족은 사랑과 정이라는 소중한 믿음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곧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도덕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가치척도의 기준이다. 안나카레리나의 법칙을 위배했던 나는 작가 박범신이 말하는 감수성 아닌 가족을 복원하였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가 세월호 사고를 접하며 진도 팽목항에서 눈물섞인 분노로 보내온 글 “젊은이들이여! 이 패덕의 시대를 부디 광정(匡正)하라! 고 했을 때, 가족은 박명림 교수의 호소에 대답할 그래서 사회를 변화시킬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말로만 이혼 소동을 벌인 작가 박범신은 한평생 자신을 위해 밥과 빨래를 하며 ‘어느 날 늙어버린 아내’에 대한 사랑을, 안나 카레리나 법칙을 위배했던 우리 부부는 세월호 사건 때문에 ‘진정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느꼈다.
사랑하는 동창들이여!! 아내 또는 남편, 그리고 아이들의 방에 들어가 ‘어느 날’ 늙어버린 배우자를, 잠자는 예쁘고 씩씩한 아이들을 그냥 바라만 보라!! 느낄 것이다. 무엇을? 사랑을, 가족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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